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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nChoi Dec 09. 2020

배신의 탁류 속 한줄기 맑은 물

세상에는 배신이 더 많을까, 신뢰가 더 많을까? 인간의 본성은 신뢰가 쉬울까, 배신이 쉬울까?

신뢰를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고, 배신은 한순간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뢰가 더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신뢰를 상실하게 만들고 배신한 주인공은 가장 가까웠던 사람, 가장 믿었던 사람이기 일쑤고, 그 치명적인 상처는 깊게 남는다.


천륜인 부모 자식 사이도 예외가 아니다.


견훤은 혁혁한 전공으로 후백제를 세웠으나 싸움터에서 생사를 함께했던 맏아들 신검에게 배반당했다. 신검은 견훤을 지금의 김제군 금산사에 가둔 것도 모자라 형제를 살해하였다.


이스라엘 왕국을 40여 년간 통치했던 다윗 왕(기원전 1107~1037)도 아들 압살롬의 반란(기원전 979경)을 피해 요단강을 건너 광야로 피신해야 했다. 압살롬은 요단강까지 건너와 끝내 아버지 다윗 왕을 추격하여 살육전을 벌였다.


중국 후한 말의 장군으로, 배신의 아이콘처럼 여겨지는 여포(?~199)가 있다. 여포는 역사적 기록과 소설 《삼국지연의》의 기록이 다르나 자신의 양아버지인 정원(?~189)과 동탁(?~192)까지도 살해하였다. 


권력 다툼에는 가족도 예외가 아니다. 역사에는 이와 같은 일들이 사실 무수히 많다. 세상은 인간 사이의 신뢰만큼이나, 그 신뢰를 무너뜨린 배신이 비중을 가리기 힘들 지경이다.


배신은 언제든지 내 삶에 닥칠 수 있는 일이다. 상대방의 감정과 선택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다. 더욱이 사람은 예기치 않게 닥치는 일을 미리 막거나 통제할 능력이 없는 존재이다. 어느 날 눈 떠보니 닥친 일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어떻게 반응하느냐 뿐이다. 그럭저럭 견딜 만해서가 절대 아니다. 그 참혹한 배신 앞에 내가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고 하지만, 아픔 자체가 성숙의 거름이 되지는 않는다. 아픔이 남긴 상처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상처는 나를 성장시키는 계기가 되거나, 곪고 덧나는 병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찬찬히 돌아보면, 세상에 배신은 어쩌일어나는 특별한 사건도 아니다.  ‘당신도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당신도 누군가에게는 배신자였다’도 상당히 적용된다. 이성과 도덕으로, 교육과 훈련을 통해 노력은 하지만, 인간은  믿을 수 없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신뢰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일 뿐이다.


하지만 눈을 돌려 보면 끝까지 신뢰를 지켜낸 귀한 사람들이 있다. 세상 끝날 때까지 믿음을 저버리지 않은 보석과도 같은 사람도 헤아릴 수 없이 있다.


세상은 소용돌이치는 혼탁한 탁류로 넘쳐나지만, 그 안에는 늘 한줄기 맑은 물과 같은 사람들이 있어왔다. 자기를 돌보지 않는 헌신, 기꺼이 내어주는 봉사, 절대적인 진실, 마지막 날까지 사랑, 신뢰를 끝내 지켜낸 이들. 그 물을 마실 수 있기에 우리는 생존할 수 있었다.

 

소용돌이치는 흙탕물에 온 몸이 젖어도, 세상에는 여전히 오염을 씻어 낼 맑은 물줄기가 존재한다.  그 물줄기에 초점을 맞출 때 비로소 돌고 돌던 흙탕물에서 나 역시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다.


 


 

 글/그림 Seon Ch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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