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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nChoi Dec 31. 2020

모래벌판에 앉아

- 벗에게 드리는 인사 -


 “모래가 싹 난다”는 속담이 있다.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을 이르는 말이다. 모래벌판은 푸성귀조차 기를 수 없다.


농사가 주업이던 전통시대에 여름에 비라도 내려 모래가 흩어지면 논밭은 망쳐졌고 물줄기도 막혔다. 미처 관리하지 못해 모래가 쌓이면 농경할 땅으로 개간할 수도 없었다. 모래 바람이 날리면 사람들이 생활하기가 도무지 성가셨다.


조선 태조 대 관료들이 임진강에 배를 띄워 임금에게 잔치를 열어 드렸다. 기껏 준비한 잔칫날에 바람이 크게 불어 모래로 눈을 뜰 수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 논밭을 뒤덮거나 곡식을 손상시키고, 물길을 막는 등 모래로 인한 재해는 수시로 중앙에 보고되었다.


조선 영조가 선왕의 무덤 참배를 위해 나선 행차에 지금 경기도 파주시에 있는 장릉(인조와 인열왕후의 릉)에 이르렀을 때의 일이다. 조선시대 국왕의 행차는 왕이 직접 현장에서 백성을 살피는 주요한 의미를 지니는 일이었다. 영조가 도승지에게 민폐를 알아오라고 명했는데, 백성들이 부당한 세금 징수보다도 앞서 입 모아 괴로움을 호소한 것이 개천이 뒤집혀 모래가 뒤덮인 재앙이었다.(영조 7년(1731) 8월 17일) 모래를 걷어낼 수도 없고, 그 땅에 농사를 지을 수도 없는 어려움을 호소하였다.


지금 바닷가에 살다 보니 모래 위를 걷는 일이 자주 있다. 사람들의 일상이 불가능한 모래 벌판,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니 온갖 사람들의 발자국이 어지럽게 수 놓여 있다. 저마다의 발자국은 있지만 일정하게 형성된 길은 없다. 이미 나 있어 그저 따라 걸으면 되는 길도 보이지 않는다. 지면이 울퉁불퉁해서 바르게 걷기도 힘들다.


살아가는 일이 모래 위를 걷는 듯 느껴졌다.  수시로 날리는 모래에 눈이 따갑고 발은 푹푹 빠지는 것 같았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어렵고, 가는 길을 알려주는 표지판도 찾기 어려웠다. 하지만 바로 그때 만나는 이들이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상관없이 스쳐 지나갔어도, 누군가는 곁에 걸으며 눈인사를 건네거나 손잡아 일으켜 주었다.


돌부리, 물 웅덩이, 모래 바람... 이런저런 난관을 지나오고 보니 사실 내 멋대로 조용히 걸어오면 되는 길이었다. 표지판도 내가 정하고, 속도도 내가 정하면 그만이었다. 남이 세워 둔 규정속도와 표지판에서 자유로워지니 여전한 모래 벌판이어도 걷기가 한결 수월하고 가볍다.


다만 누군가 나에게 그래 주었던 것처럼, 나 역시  걷다가 만난 이들에게 미소 지음을 잊지 않으려 한다. 손을 내밀어 잡아주어야 하지 않는가 살펴보려 한다. 말 벗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아닐까 살펴보려 한다. 

어쩌면 그들도 나처럼 힘든 발걸음을 옮기고 있을 터이니 말이다.


<모래벌판의 말벗>


우리 삶을 

산을 오르는 것으로 비유하는 글을 많이 봐요.

‘정상’‘목표’ 운운하며..

해발고도도 자꾸만  높여요.


산 정상에서 살 수는 없잖아요.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야 해요. 

그곳은 결국 벌판이라 생각해요.


바닷가에 자주 나가요.

이 모래 벌판이 삶의 자리처럼 여겨져요.


바다는 저 멀리를 향한 꿈을 꾸라며 넘실거리는데

저는 파도처럼 영원히 오르지 못할 뭍을 향해

부서지고 부서지며 흩어져 버리곤 해요.


뙤약볕에 잠시 주저앉아 말동무를 기다려 볼까 해요.

아...

모래를 털고 다시 일어날 수 있어요.

다가와 말 걸어준 모든 분들, 정말 감사해요. 


글/그림 Seon Choi


코비드로 모든 일정 다 취소하고, 버티어 내는 시간에 브런치를 시작했어요.

저로서는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어요. 인터넷 공간에 저를 드러내는 것을 극심히 두려워했거든요.

시간 내어 글 읽어 주시고, 댓글 주신 모든 분들...... 정말 너무 감사해요.

더 좋은 글 쓰려고 늘 노력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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