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기유학생 최치원 -
“10년을 공부하여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라고 말하지 마라.
나도 아들을 두었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12살에 당나라로 떠나는 어린 아들 최치원에게 아버지가 공부에 힘쓰라면서 한 말이다(868년, 신라 경문왕 8). 최치원 자신도 아버지의 말을 받들어 ‘다른 사람이 백을 하면 나는 천을 한다는(人百己千)’ 심정으로 학문에 정진했다고 한다. 유학한 지 7년 만인 874년에 최치원은 18세의 나이로 당의 빈공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최치원의 이 이야기와 그의 삶에 대해서는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요즘으로 하면 최치원은 초등학교 5학년 나이에 당나라에 건너가 7년을 공부한 조기 유학생이었다. 그것도 6두품 신분이었다. 10대라는 어린 나이에 그 시간을 어떻게 보냈을까는 그저 상상으로만 짐작할 수 있다.
사실 최치원과 같은 사람들은 살면서 어쩌다가 만날까 말까 한 ‘천재’이며 ‘위인’이다. 신선이 되었다는 속설까지 있는 사람이다. 너무 익숙하지만, 각종 위인전에 나오는 인물도 그러하다. 삶의 귀감이 되고, 바람직한 방향을 보여주고, 인류 역사에 그런 인물이 존재했다는 것만으로도 감동이다. 하지만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들이다. 평범을 넘어선 비범한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미국에 살 때도 그러하였지만, 지금 캐나다에서도 어린 나이에 부모를 떠나 홀로 와 있는 조기유학생을 종종 만난다. 중고등 학생은 물론 초등학생도 있다. 대개 이른바 ‘홈 스테이’라는 용어를 가진 남의 집에서 부모 없이 성장해 내고 있다. '홈 스테이'가정을 방문했을 때, 머쓱하게 인사하고 방으로 들어가는 아이들, 싸주는 도시락을 군말없이 들고 등교하는 아이들...그래...너희들이 여기 이렇게 있구나...
다른 사람의 선택과 결정에 대해 누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싶다. 그런데 우리 삶을 돌아보면 10대는 어떤 방식으로든 얼마나 부모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기이던가! 성장통을 겪는 그 시기, 매일의 일상에서 부모의 존재 자체가 갖는 의미는 얼마나 절대적이었던가! 난 최치원 후손이라고 하지만, 절대로 그와 비슷한 사람도 못된다. 어릴 때는 어려서, 10대에는 성장하느라, 매일 밤 엄마 이불로 파고들었어도 엄마가 그리웠다.
이제는 다양한 통신 수단이 있어 참으로 요긴하다. 그것이라도 십분 활용했으면 한다. 같은 공간에 있건, 혹시 각자의 이유로 떨어져 지내건 소통할 수 있는 온갖 수단이 있으니 다행이다. 세심하게, 아주 세밀하게 마음을 몽글몽글하게 해 주는 가족의 사랑, 살아가는 힘이 되어 주는 '참 사랑'이다.
<균형>
저는 자전거를 못 타요.
균형을 잡지 못해 흔들릴 때
뒤에서 잡아 줄 아빠가
안 계셨어요.
그렇지만
엄마의 세심하고 지극한 사랑으로
걸음걸음 크게 넘어지지 않고
걸어오고 있어요.
엄마 앞에서 저는 여전히 어린아이로 살고
엄마 눈에 저는 자라지 않는 막내딸...
그렇게 평생을 소통하는 사이
그 소통은 넘어지려다가도
균형을 찾게 하는 힘이 되고 있어요.
글/그림 Seon Choi
2020년 올해는 많은 이들이 어쩌면 제일 쓸쓸한 성탄, 연말연시를 보내고 있으리라는 생각입니다.
그래도 이 지구 위에 가족이 있고, 소통의 길이 있어 다행입니다.
모두 따뜻한 연말연시 되시길 축복합니다.
내년은 우리 삶이 지금과는 많이 달라지리라 소망합니다. 감사합니다.
※ 빈공과 - 당 나라에서 주변 국가에서 온 유학생을 대상으로 한 과거시험.
신라인은 80여 명에 이르렀고, 발해는 10여 명에 이르는 빈공을 배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