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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nChoi Dec 20. 2020

거짓 피리질을 멈추라

조선의 사대부가 관직에서 물러남을 청할 때가 있다. 노부모가 병환이 나서 돌봐야 하는 것을 비롯해 여러 이유로 사직을 청한 일이 상당히 많았다. 그들은 국왕에게 상소문을 올려  ‘자리만 도적질을 하고 있다.’ ‘재주가 없으면서 자리만 채우고 있다’라며 관직을 파하거나, 임명을 철회해 줄 것을 청하였다. 그럴 때 자주 나오는 표현이 ‘능력이 없는 몸으로 외람되게 '피리를 부는 대열'에 끼게 되었다.’이다.


이는 《한비자》에 나오는 고사를 인용함이다. 중국 전국 시대 제(齊) 나라 선왕(宣王)은 ‘전통 피리’라 말할 수 있는 ‘우’(竿, 생황) 합주 듣기를 좋아했다. 그는 삼백 명이나 되는 악단을 소집하여 함께 불도록 했다. 선왕은 이 악사들을 매우 후하게 대우하며  합주를 즐겼다.


이를 알고 남곽(南郭)이라는 사람은 피리를 전혀 연주하지 못하는데 악단의 단원이 되었다. 악사들이 함께 연주할 때마다 그는 악대에 어울려 연주하는 것처럼 행세했다. 아무도 그가 소리를 내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자리만 차지한 채, 후한 대우를 즐겼다.


그런데 선왕이 죽고 역시 음악 연주를 좋아하는 그의 아들 민왕(湣王)이 왕위를 이었다. 민왕은 한 사람씩 연주하는 것을 듣기 좋아하였다. 악사가 한 사람씩 국왕 앞에 나가 연주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거짓으로 연주하는 척하며 자리만 차지했던 남우는 줄행랑을 놓아버렸다.


나는 내가 가짜로 피리를 부는 사람이 되는 ‘악몽’을 자주 꾸었다. 

강의실을 가득 메운 학생의 모든 눈이 교단 위의 나에게 집중되었다. 수업을 시작해야 하는데, 준비한 강의안은 아무리 찾아도 나오지 않고, 말은 자꾸 헛 나와 쩔쩔매다가 깨어났다. 

교실 한 구석에 앉은 나에게 책상 위로 선생님이 시험지를 주고 지나가신다. 다른 친구들은 열심히 답을 쓰는데, 나는 도무지 모르는 문제여서 답을 쓸 수 없어 덜덜 떨다가 깨어났다. 가장 많이 꾸는 두 가지의 꿈이다.


왜 멋있게 피리를 불어대며 갈채를 받는 행복한 꿈이 아니라, 가짜 피리를 불다가 들킨 것 같은 꿈만 꾸는 것일까. 왜 한 번쯤은 선생님이나 친구들 앞에서 여봐란듯이 일필휘지로 답안을 쓰는 꿈을 꾸지 못하는 것일까. 나도 남우처럼 헛 피리나 불어대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긴장과 부담에 늘 눌려 있던 탓일 것이다.


세상에 피리 소리가 요란하다. 

저마다의 곡조로 소리 높여 불어대니 듣는 이에게는 조화로운 합주가 아니라 듣기 괴로운 소음이다. 그들에게 악몽은 찾아가지 않는가 보다. 


'자리만 차리하고 헛 피리질 하는 분들이시여, 제발 멈추어 주시오.' 

'그대 나에게 헛 피리를 불어주는 거라면, 제발 멈추어 주세요.' 


진실한 피리 소리, 그 소리에 맞춰 사랑, 기쁨, 신뢰, 존경을 실은 춤을 추고 싶다. 




<거짓 피리>


사랑 앞에서

세상을 향해

나 자신에게까지

불어대는 척하는 거짓 피리


언젠가 왕 앞에

혼자 불려 나가는 날


그 날에는

되돌아 숨을 곳이 없음인 것을


글/그림 Seon Choi


※ 인용한 고사는 濫竽充數(남우충수), 또는 ‘취우충수(吹竽充數)’ 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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