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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nChoi Feb 02. 2021

문화유산 답사에서 나누는 소통

- 귀를 기울이는 만큼 들린다 -

사학을 전공하였기에 ‘고적답사’‘사적 답사’를 자주 다녔다. 1990년대 이후는 유홍준 선생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문화유산 답사’라는 표현이 보다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답사할 목적지를 정하고, 관련 조사를 하고, 도착하기까지 여정 내내 역사적 상상에 빠지곤 했다. 그곳을 오가던 사람들, 그들의 삶을 그려보며 가는 여정은 답사의 발걸음을 들뜨게 했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상상의 결정체를 만난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구조물, 답사라는 말답게 발로 디디며 돌아볼 언저리까지 문화유산 답사는 다양하다.  풀만 무성한 ‘터’를 보고 돌아오는 일도 흔했다. 


책상 앞에 앉아 관련 자료만 읽어도 그만일지 모르는데, 굳이 현장에까지 가서 몇 백 년 전, 심지어 더 오래 전의 상황을 그려보는가. 그곳에 가면 그 현장에 있던  삶 자체를 만나기 때문이다. 사적지에 머무는 시간은 잠시지만, 그 시간은 비로소 나와 옛사람이 만나는 삶의 현장이다. 역사적 상상력으로 그 만남은 나에게는 생생한 소통의 공간이 된다. 


그들의 삶이 내 삶으로 들어오지 않는 한 과거는 박제된 죽은 생명체일 뿐이다. 먼지 쌓인 정지된 흔적일 뿐이다.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과거를 만나면 과거는 그저 죽은 자들의 이야기로만 존재한다. 


옛 선비들도 답사를 자주 다녔다. 명승고적을 비롯한 사적지를 두루 다니며 그 감회를 글로 옮겨놓곤 하였다. 조선 후기 재상에 오른 문신이며 학자인 장유(1587~1638)가 청평산 문수사(文殊寺)를 답사하여 읊은 시가 있다. 문수사는 고려  이자현(李資玄, 1061~1125)이 벼슬을 마다하고 들어와 37년을 머문 곳이다. 그곳은 고려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이 지은 비문도 남아있었다. 


경운산 찾아들어 절간 문 두드리고 

명승고적 하나하나 두루 답사하였는데 

두 개의 비에 글자는 없고 이끼만 반이 덮여

치자꽃만 수풀 속에 스스로 피어있다 

당시의 식암자는 보지 못하고

시만이 산마루 언덕에 남아 있구나 


여기의 식암자는 이자현을 말함이다.  그의 시문을 보고 그가 거닐던 산자락을 바라보며 옛사람을 그리며 마음으로 함께 하고 있다. 500여 년을 거슬러 올라 장유는 은거한 이자현을 만나고, 두 비를 세운 이제현과 대화함이다. 



사적지 답사는 이와 같이 그 장소에 살았던 사람과의 소통이다. 그들의 삶의 노래,  사랑,  눈물, 아픔, 이별.... 유한한 인간이 어쩔 수 없이 맞는 삶의 안타까움을 읽는다. 반드시 사적지만이 아니다. 지구 위 어디를 가든  귀를 기울이면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다. 아무도 살지 않는 외진 곳이라도 직접으로든 간접으로든 누군가의 삶이 스친 현장이다. 그곳에서 목청 높이 내 목소리만 던지고,  돌아오지는 않았는지. 

귀를 기울이면 들리는 소리가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유명한 말이 있듯이, 귀를 기울이는 만큼 들리는 소리가 있다. 


다른 이들의 말과 귀, 표정, 몸짓도 그러하다. 마음을 기울이는 만큼 보이고, 들린다. 

이 브런치 공간에 적힌 글자들, 간간히 보이는 사진과 그림....그 너머의 사람과 그 삶. 현재 진행형인 브런치 공간의 '답사'에 나는 오늘도 마음을 다해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열어본다. 그것이 사람에 초점을 두어야만 하는 역사를 공부한 내 삶의 몫이다.

다른 사람의 삶을 내 삶에 품지 못하면 나는 책 안에, 내 글안에 죽은 생명체일 뿐이다. 


<담소>

우리 같이 걸어요.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천천히, 오래 오래

이야기 나누어요.


-인용문은《계곡집》 26, 〈청음이 청평에서 노닐며 지은 시에 화운함〉의 일부. 한국고전번역원DB

두 비는 모두 없어졌고, 돌 받침만이 남아있다. 두 비가 워낙 유명하여 탁본이 남아 있어 서체와 내용은 전해진다. 


글/그림 Seon Ch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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