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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nChoi Jul 26. 2021

순서가 없다는 고통과 자비

- 참척을 겪은 지인을 보며 -

세상일에는 순서가 있다. 무슨 일을 행하거나 이루기 위해서는 차례가 있기 마련이다. 우주의 질서부터 일상에 까지 순서가 존재한다. 매일의 일상에 번호표에 따라야 하는 일도 더 확산되었다. 특히 코로나 이후로는 은행이건 병원이건 안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잠긴 유리문 밖에서 부여받은 번호의 순서가 오기를 기다려야 한다. 그 숫자의 위용이 어찌나 강한지 개인 사정보다 번호 순서가 우선이다. 


그렇지만 우리 삶에는 그 순서가 곧잘 비껴나고 어그러지는 일이 생겨난다. 그렇게 틀어진 순서로 인한 짐은 인생에 다양한 의미로 자리한다. 최립(1539~1612)은 봄날에서 비껴선 자신이 가을의 처량함을 지고 있음을 읊었다. 


사계절이 순서대로 물처럼 흘러가다가도 

어느 땐 급히 쏟아져서 곤두박질도 치는지

어찌하여 나는 지금 맞이한 이 봄철에 

홀연히 처량하게 가을 기분을 느끼는가


계절은 순서대로 흐르고 있지만, 글쓴이의 계절은 봄을 지나 가을로 넘어가 버렸다. 한 치도 어그러짐이 없는 계절의 순서와 달리 마음의 계절은 건너뛰기도 하고, 멈추어 있기도 한다. 사시사철의 순서가 멈춰버려 꽁꽁 얼어붙은 겨울을 살고 있는 사람도 있을 터이다. 


세상사 일의 순서와 일을 대하는 마음의 순서가 맞고 어긋나고는 성격도 한몫 차지한다. 최한기(1803~1877)라는 유학자는 사람은 ‘저마다의 기질에 따라 일을 헤아리는 것도 다 다르다’는 제목의 글에서, “기질이 조급한 사람은 편안하고 한가롭게 순서를 따르는 것을 느리다고 한다.”라고 지적하였다.  


세상사의 순서와 내 마음의 순서가 어그러져 슬프거나 답답해도 어쩌면 견딜만한 일이다. 가장 매정하고 야박한, 차마 견디기 어려운 순서의 어그러짐은 나이 순서를 어기고 젊은이가 앞서 가는 일이 아닐까. 그것도 자식을 먼저 보내는.


공자의 주요한 제자로 말해지는 자하(子夏)는 서하(西河)에 살았는데, 아들을 잃고 울다가 눈이 멀어버렸다. 이를 가리켜 자식을 앞세운 경우를 ‘서하의 아픔’[西河之痛]을 당하였다고 한다. 일반적인 표현으로는 참척(慘慽), 곧 ‘참혹한 슬픔’이라 하였다. 


조선시대 재상을 지낸 최규서(崔奎瑞, 1650~1735)가 있다. 영조가 조정 행사에 참석할 것을 명할 때 참척으로 인한 자신의 입장을 간절히 고백하였다.  


신은 참척(慘慽)을 당한 이후로 병세가 한층 더 악화되어 이달 1일 입시했을 때도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예법에 맞는 몸가짐을 잃었습니다.... 또 사나흘 전부터 감기에 심하게 걸려 오늘 유지를 받을 때 뜰에 나가 절도 하지 못할 정도로 병세가 위태위태합니다. (1724(영조 즉위년) 11월 8일


영조 대 문신 윤지(尹志, 1688~1755)는 집안의 참척으로 인해 관직을 거두어 줄 것을 청하였다. 


신의 노모가 지금 73세인데, 두어해 전에 거듭 ‘참척’을 당해 지나치게 슬퍼하다 보니, 몸이 상하고 기력이 다 떨어져 평소에도 항상 위태로웠습니다. 그런데 이달 초에 또 신의 여식이 요절하는 아픔을 겪고는 배나 더 놀라고 애통해하여 밤낮없이 슬피 울고 있습니다... 신이 혈혈단신 홀로 남아 손수 수발을 들고 있어 잠시라도 차마 자리를 뜰 수 없습니다. (1724(영조 즉위년) 10월 23일


윤지의 어머니도, 그 스스로도 참척으로 인해 힘든 시간임을 하소연하며 관직을 거두어 줄 것을 청하였다. 참척은 곧잘 일어나는 참혹한 비극이었다. 어쩌면 특히 근대 이전은 자식이 모두 온전하게 성장하여 부모를 먼저 떠나보내는 일이 오히려 드물었으리라 짐작된다.


한국전쟁을 겪으신 나의 할머니는 피난길에 날아오는 포탄 파편에 아들(내 어머니의 오빠)을 잃으셨다. 누가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시라고 하면 기겁하시면서 말씀하셨다. 오래 살다가 자식을 또 앞세우는 일 당할까 무서워 얼른 가야 한다고. 어디 우리 집안만의 일일까 싶다.


세상에 나온 순서가 한참 뒤에 있던 사람이 불현듯 먼저 떠나버림은 참 감당하기 힘든 슬픔이다. 특히 가족에게는 참혹한 고통이다. 떠나는 날이 순서대로 이르지 않음은 비극이지만, 어쩌면 모든 인간에게 두려움을 유보하게 하는 자비일지도 모른다. 언제 내 순서가 불현듯 닥칠지 모른다는 긴장은 있지만, 때를 모르니 아직 주어진 이 시간에 감사하며 오늘을 살아낼 수 있음이다. 


※ 최립의 시의 출처는 그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631년에 간행한 시문집인 《간이집》 6.

※ 최한기의 말은 그의 문집인 《추측록》(1836년 제작) 5권에 실린 〈추기측인〉(推己測人) ‘기질(氣質)의 가림에 따라 헤아리는 것도 각각 다르다’에 나오는 내용.  한국고전번역원 DB.

※ 그림 김재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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