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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nChoi Aug 09. 2021

‘시간계획표’가 사라진 자리

-분초로 파고드는 스마트 폰

학창 시절 내내 지키지 못한 ‘시간계획표’를 얼마나 많이 그렸던가! 때마다 동그라미 안에 24시간을 빼곡히 배분하여 그려 넣은 시간계획표를 작성했었다. 최대한 알차게 구성하여 책상 앞 정면에 잘 보이게 붙여 두었지만, 잘 지킨 경우는 내 평생 한 번도 없었지 싶다. 초중고 시절에 생활계획표, 공부계획표 등의 이름으로 24시간을 각각의 활동으로 배분하여 관리하는 훈련은 분명 매우 유용한 일이다. 하지만 나는 늘 제대로 실천하지 못한 학생이었다.


만일 시간이 인간의 것이라면, 아마 인간은 영원히 늙지도 죽지도 않을 것이다. 시간은 인간의 사정과 상관없이 그 어떤 예외도 없이 지독하게 공평히 흘러간다. 그 시간을 대하는 방식은 저마다 다르다. 알뜰살뜰하게 활용하는 사람도 있고, 전혀 다른 관점과 방식으로 시간을 대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방식으로 하루를 보내건 우리 삶에는 중간중간 비는 시간이 생긴다.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 식사는 마쳤지만 아직 남아있는 점심시간, 약속 장소에 일찍 도착하여 갖게 된 여유 등. 세상은 그런 촌각의 시간마저 아끼라고, 철저히 활용하라고 부추긴다. 그런 독려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고려 후기 저명한 유학자인 이곡(1298~1351)이 그의 아들 이색(1328~1396)이 어릴 때 지어 전한 시가 있다.


삼십 년 전 책 읽기를 게을리하여

허옇게 머리가 센 뒤에야 헛된 명성을 탄식한다.

너는 지금 분초 같은 짧은 시간마저 아껴 공부하라

《가정집》 제18권


‘분초 같은 짧은 시간’으로 의역한 한자 원문은 ‘분음’(分陰)이다. 이는 아주 짧은 시간을 지칭한다. 조선시대는 하루를 24시간이 아니라 12지로 나누었다. 분초를 나누는 세세한 시간 구분은 없었지만, 아주 짧은 시간을 지칭하는 용어는 있었다. ‘촌각을 다툰다’, ‘경각에 달렸다’ 등의 표현이 그러한 예다. 생활계획표는 ‘초’까지는 아니지만 ‘분’ 단위로는 나누어 그렸다. 지키지 못했지만 나 역시 분초 같은 시간마저 아껴야 한다는 주입된 의지는 있었다.


대학에 입학하니 시간이 학기 단위로 뭉텅뭉텅 구획되어 흘러갔다. 일 년은 둘로 턱 턱 나뉘었고, 두어 달은 아무런 일정 없이 텅 비었다. 시간표를 따라 움직이는 계절조차도 그 사이사이에 쑹덩 쑹덩 비어있는 날이 있었다. 온전히 내가 주체적으로 관리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빽빽하게 짜인 시간에 따라 움직이는데 익숙했던 대개의 대학 초년생은 그 시간을 알아서 채우는 일에 서툴렀다.


하지만 학기가 쌓여가면서 저마다 비어있는 그 시간을 각자의 방식으로 메워나갔다. 세상이 지금보다는 단순했던 시절이었다. 어떤 내용으로 시간을 채우건 움직임이 수반되었고, 대개는 동행도 있었다. 영화를 보려면 내 몸이 극장 의자에 앉아 있어야 하거나, 비디오 대여점을 가야 했다. 책을 빌리려면 도서관에 가야 했고, 친구들은 일정한 공간에 물리적으로 함께 있어야 만나는 거였다. 그렇게 저마다 각자의 장소에서 자신의 선택에 따른 행동을 나름의 사람들과 함께 하며 그 시간을 채워 나갔다.


이제 특정한 시간에 어디에서 누구와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식의 고민은 사라졌다. 손 안의 스마트폰이 모두의 시간이며 세상이다. 혼자 밥을 먹어도 어색하지 않고, 친구와 함께하지 않아도 불편하지 않다. 대중교통 안에서 보내야 하는 시간도 고민할 필요가 없다. 분초 같은 시간이야 말로 스마트 폰을 가장 요긴하게 활용하는 시간이다.


이제 스마튼 폰은 자투리로 나는 빈 시간을 메우는 것을 넘어선 지 오래이다. 다른 일정이 짜여진 시간마저 분초를 단위로 무섭게 잠식해 오고 있다. ‘분초 같은 시간’은 여러 시간에서 여러 날로 확대되어,  시간계획표에는 스마트 폰만 덩그러니 그려있는 실정이다. 스마트 폰으로 보내는 이 ‘분초 같은 시간’, 우리의 삶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그럴까 말까>

시간 있냐고

재미있는 거 보시냐고

말을 걸어볼까

그냥 내릴까


왜 자꾸 보냐고

스마트폰 처음 보냐고

화를 낼까

그냥 무시할까


※ 본문에 인용한 《가정집》제18권에 실린 이곡의 시의 일부이다. 시가 함유하는 의미와 인용한 내용은 깊지만, 여기에서는 그 일부만을 읽기 쉽게 풀어 서술하였다. 출처는 한국고전번역원 DB. 2007년 이상현 번역으로 시가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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