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주하게 살아온 시간이 잡힌 것도 없이 가버렸다. 지금 내 삶의 계절은 지금과 같은 11월에 접어든 어느 가을날 정도일까. 꿈으로 피어났던 봄, 지독히도 치열했던 뜨거운 여름, 흩어진 열정의 어수선함을 차분히 가라앉힌 가을도 빠르게 지나가고 있다. 분주함으로 달리던 내 앞에 커다랗게 ‘잠깐 정지’ 팻말이 보인다. 네 달리는 목적지가 어딘지 아느냐고 비웃듯이 묻는 큰 글씨이다. 흠칫 멈춰서 올려다보니 내 삶의 겨울이 그리 멀지는 않았음을 주지 시킨다.
책상 앞에 앉아 회전의자를 휘휘 돌리며 집안을 돌아보니 온 집안에 봄날의 말린 꽃 부스러기, 퇴색한 초록 잎, 가을 초엽의 낭만 어린 국화가 먼지를 풀풀 날리며 가득하다. 달려온 날이 남기고 간 물건이 구석구석까지 빼곡하다. 팔십 중반에 들어선 엄마는 겨울 맞을 준비를 차곡차곡 해 두셨다. 유언장과 완납한 상조회사 카드, 거부의사를 공증받은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담은 봉투위치를 자손에게 일러두었다. 온갖 물품을 정리하고, 묏자리도 준비해 두셨다. 부고를 알릴 연락처도 정갈한 글씨로 정리해 내게 건네셨다. 엄마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나의 순서는 당연히 엄마 뒤거니 하는 생각을 비웃으며 너의 계절도 곧 겨울이 들어선다는 커다란 팻말이 보인다.
삶의 계절을 보내느라 쌓인 게 왜 이리도 많은가. 6단 책꽂이 8개가 방 두 개에 걸쳐 꽉 차 있다. 서랍마다, 여러 개의 박스마다 온갖 자료와 공책, 크고 작은 메모지로 정신없다. 한두 번쯤 필체가 좋다고 칭찬받은 손글씨로 빼곡하게 적어놓은 글들. 어릴 때부터 엄마에게 지독하게 교육받은 습관으로 메모는 꼭 가로세로 열을 맞추어 같은 크기의 글씨로 적혀있다. 사선으로 삐치거나 행렬이 흐트러진 글씨는 보이지 않는다. 나의 알량한 지식을 위해 참으로 많은 종이를 희생시켰다.
‘하! 내가 이렇게 천재였나!’
지난날의 내가 천재였기 때문이 절대 아니다. 지금의 내가 총명함이 쇠했다는 뜻이다. 나는 아닐 줄 알았는데, 젊은 날의 글들은 젊은 날 지녔던 명민함이 퇴색했음을 확인시켜 준다.
분리수거장에 가져가기 위해 바퀴 달린 작은 카트를 준비했다. 책꽂이에서 뺏다가, 다시 집어넣었다가, 기어이 다시 꺼내놓은 책들을 카트에 담으며 또 떠들어 본다. 눈을 질끈 감으며 담는다. 어렵게 섭외해 미국 뉴욕 끝자락 고즈넉한 곳에 위치한 한국 관련 고문서고에서 수집한 자료들. 비닐 파일에 한 장 한 장 정리해 둔 수백, 수천 장의 자료도 모두 던져 넣었다. 온갖 필기체를 읽느라 머리가 다 빠질 것 같았지만, 자료를 이용해 제법 많은 글을 쓸 수 있었다. 나만 이용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 복사해 온 자료니, 누구에게 건넬 수도 없다.
카트에 담아 끙끙거리며 분리수거장으로 끌고 갔다. 가장 깨끗하지만, 제 위치를 벗어나면 가장 냄새나고 더러운 쓰레기가 되는 것, 여러 집에서 나온 온갖 음식이 뒤섞여 네가 이런 것들을 먹고 버렸냐고 호통 치듯 강한 냄새로 버티고 있다. 음식쓰레기나 카트에 어수선하게 담긴 내 삶의 흔적이나 제 몫을 다했음은 마찬가지다. “종이류”라는 글자가 박힌 커다란 플라스틱 통에 종이로 남은 그 흔적을 던져 넣었다. 어떤 이를 영원히 떠나보내는 듯 나 혼자 치른 경건한 의식이었다.
짐을 덜어낸 카트는 내 뒤에 끌려오며 덜덜덜 바퀴소리를 크게 냈다. 처음으로 후련했다. 그리고 참 개운했다. 방안 책꽂이가 휑하다. 내 눈에만 보이는 비어진 공간, 덜어내진 삶의 무게. 나만 느끼는 가벼워짐과 나에게만 보이는 공간이 이제 무엇을 하려느냐고 묻는다. 지금 나는 알지 못하지만 내 삶의 여정이 아직 이어지고 있으니 무엇이든 새로이 채워지겠지. 살아있는 몸짓을 멈추지는 않을 터이니. 빈 공간의 홀가분함을 잠시만 누리자며 조용히 이불을 쓰고 잠을 청한다. 머릿속에 새롭게 쓰고 싶은 글들이 요동친다. 나는 벌떡 일어나 다시 컴퓨터를 켠다. 학문적 글쓰기에서 문학 글쓰기로 내 남은 계절이 달려 들어간다. 나의 남은 계절, 그 글쓰기가 작은 울림이나마 될 수 있다면, 한평 차지한 지금 내 자리가 헛되지 않으리라 스스로를 위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