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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nChoi Nov 12. 2021

마음으로 코끼리 만지기

여섯 명의 장님이 각각 코끼리의 상아, 귀, 다리, 등, 배, 꼬리를 만지고 저마다 이렇다 저렇다 말했다는 우화가 있다. 조선시대 유학자가 쓴 글에도 종종 그 글귀가 눈에 보였다. ‘여러 명의 맹인이 코끼리를 더듬다’(衆盲摸象)는 표현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 홍대용(1731~1783)이 조욱종이라는 청년에게 준 글의 일부이다.


그대들이 나를 찾아와 강학한 지도 이미 2년이 되었다. 뭇 소경이 코끼리를 어루만지는 격이었으니, 자못 부끄럽고 우습도다. 다만 나의 인도가 잘못되었을 뿐 아니라 그대들도 참으로 진취할 뜻이 없었다.


홍대용의 나무람은 학창 시절 나의 스승이 늘 하시던 말씀과 통한다. 역사학을 하면서 큰 숲을 보는 안목을 갖추지 못한 채, 나무 가지 하나만을 붙잡고 들여다보는 것은 아닌지 유념하라고 하셨다. 홍대용도 ‘학문적 토론의 장에서 자칫 비루한 해석으로 장님이 코끼리를 더듬는 격이라는 비판을 들을까 두렵다’고 스스로를 경계하였다. 나 역시 학문의 길을 걸으면서 스승의 그 말을 늘 기억하고 유념하며 노력해왔다.


학문에서 한 걸음 비껴서 일상의 삶을 그리다 보니 코끼리 우화가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코끼리 우화에 등장하는 소경을 빗대어 전체를 볼 줄 모른다고 비웃기 쉽지만, 인간은 일부만 더듬어 짐작할 수 있는 한계를 가진 존재라는 생각이다. 눈으로 본다고 한들 코끼리를 어떻게 완벽하게 알 수가 있겠는가. 아니 당최 인간이 숲을 볼 능력이 있기나 한 것일까.


학문에도 그러하지만 사람에 대한 ‘앎’도 마찬가지이다. 오래도록, 또 아주 가까이 관련을 맺은 사람이라 하여도 정말 서로에 대해 ‘잘 아는’ 사이인가. 가장 친밀하고 사랑하는 사이이지만 엄마가 모르는 면이 나에게 얼마나 많은가! 때로 몰래 흘린 눈물, 감추었던 좌절, 꺼내 보이기 힘든 아픔, 아니 사랑조차도 나의 엄마가 아는 부분은 나의 일부이다.


어떤 분이 자기를 험담하는 말을 다른 사람을 통해 건네 들었다고 한다.


“그분이 저를 잘 몰라서 그 정도만 흉을 보았네요.

저를 조금 더 잘 알았더라면 아마 그 보다 열 배 이상 흉봤어야 했을 거예요.”


얼마나 지혜로운 반응인지 듣는 순간 감탄사가 나왔다. 사실 알고 모르고 가 인간관계의 핵심은 아니다. 알고 모르고 여부와 차원을 달리하는 사랑, 이해, 공감이 관건인 듯하다. 가족을 비롯해 지금 인연이 닿아있는 사람들을 잘 알기 때문에 사랑하고 아끼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비록 내가 상대방의 꼬리만 더듬을 수 있거나 귀의 생김새만 안다 하여도, 지금 내 손으로 그 일부를 만져볼 수 있음이 소중하다. 이렇게 같은 시간을 함께 살아있는 생명이라는 자체가 의미를 갖는다.


최근 캐나다에서 알게 된 벗들, 살아온 모습도 다르고 알게 된 시간도 길지 않다. 그런가 하면 한국에서 수십 년을 한 울타리에서 같은 일을 하며 사소한 습관까지 꿰뚫고 있는 벗들도 있다. 하지만  사랑, 우정, 행복, 이해가 담긴 웃음과 따뜻함, 그 소중함에는 아무런  다름이 없는 귀한 벗들이다.


들판의 싱그러운 풀, 하지만 일정한 지나면 말라 사라지고, 그 풀이 낫던 자리에는 풀이 있던 흔적마저 사라져 버린다는 말이 있다. 이 땅 위 생명은 모두 그러하다. 그러니 지금 여기에서 햇살을 누리고, 바람에 흔들리며, 흐드러지게 어우러져 싱그러운 풀 무리로 함께 있음이 소중하지 않은가. 상대방에 대해 무엇을 얼마나 알 수 있으며, 알고 모르고 가 무슨 문제가 될까. 오늘 나에게 소중한 사람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사실 코끼리 꼬리일지도 모른다는 것, 하지만 모르는 그 다른 부분까지도 모두 품고 사랑하려 함이 의미 있을 뿐이다.


※ 본문에 인용한 글은《담헌서》 외집 1권에 〈매헌에게 준 글〉[與梅軒書]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글이다. 조욱종의 호가 매헌이었다. 출처는 한국고전종합DB

※ 글제목 사진 : 비 내리는 날 문득 바라본 유리창, 창밖의 풀, 나무..by Seon Choi


인사 올립니다.

브런치가 맺어준 귀한 작가님들, 평안하셨는지요.

이 공간에서의 만남이 이제 오랜 벗처럼 마음에 담겨 있지만, 아는 것은 정말 장님이 코끼리 일부만을 만지는 것보다도 못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글을 읽을 때마다 실로 글이 가진 위력을 느끼곤 합니다.

화면에 보이는 글자를 읽는 수단은 ‘눈’이 아니라 ‘삶’인 듯합니다.

제 삶에 작가님이 글로 보여주시는 삶을 담아보고 공감하며 귀한 인연에 감사하며 지냅니다.

한동안 글을 못 올렸습니다. 찾아뵙고 복습부터 하는 게 순리인 듯싶어 댓글 창은 닫았습니다.

찬찬이 찾아뵙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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