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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nChoi Nov 18. 2023

여우 굴

한국에서 촉촉한 가을의 정취를 안고, 몰아닥치는 찬바람을 뒤로하고 캐나다에 돌아왔습니다. 갈수록 길게만 느껴지는 비행시간,  언제쯤 여기에 뼈를 묻으리라 하는 한국의 내 집에서 살 수 있을까를 그려봅니다. 당장 올 수 없는 날이면 당분간은 이 오가는 여정에 잘 적응해야겠지요.     


저는 산파의 도움으로 태어난 집에서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까지 살았습니다. 겨울이면 밖에서 꽁꽁 언 발을 녹이는 안방 아랫목, 아침에 학교 가려면 엄마가 신문지로 둘둘 말아 아랫목에서 데워진 신발을 건네주던 그 안방 아랫목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제가 성년이 되어서야 엄마는 그 집을 정리하고 아파트로 이사했습니다. 결혼하기 전 ‘이사’의 경험이 그렇게 한 번이었습니다. 결혼 후 처음 1년여를 시댁에 살다가 분가를 했습니다. 같은 아파트 단지의 앞 뒷동으로 지금까지 살고 있습니다. 중간에 재건축이 진행되어 잠시 20분 거리로 떨어졌지만, 지금은 다시 104동 101동으로 살고 있습니다.     


삶이 이렇다 보니 저는 ‘농경민족의 후예’처럼 한 곳에 뿌리내리고 사는 게 딱 제 체질이라고 했고, ‘집순이’가 자타공인 별명이었습니다. 그렇게 한 자리에 붙박이처럼 살던 삶이 어느 날부터 제대로 역마살을 맞았습니다. 요즘은 부정적 의미가 퇴색했지만 전통시대만 해도 역마살은 ‘액운’으로 취급했습니다. 사람이 분주하게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니 액운이라 한 거지요.     


엑셀 파일로 출입국 기록을 정리했더니 참 화려(?)합니다. 미국 엘에이, 미네소타, 캐나다 몬트리올, 밴쿠버... 북미의 동부는 정말 한국에서 너무도 멀었습니다. 눈 덮인 미국 북동부, 지상도로 제설작업이나 항공기 표면의 '디아이싱(De-Icing)' 작업으로 탑승 뒤 꼼작 못하고 3시간 가까이 앉아 있는 일도 있었습니다. 드라마 ‘도깨비’로 유명해진 퀘벡은 밴쿠버 공항에서 다시 비행기를 타고 5시간 넘게 날아가야 도착했습니다. 지금은 그나마 캐나다 서부로 옮겨와 비행시간이 11시간 정도입니다. 매번 다시 하라면 절대로 못할 일이지 싶은데, 또 하고 또 하고 있습니다.     


어느 분이 ‘국제결혼‘하여 해로했는데 나이 드니 입맛이 달라 힘들다는 고백을 들었습니다. 젊은 시절 타국에 사느라 힘써 적응해 온 것이 퇴색하고 가라앉아 있던 어린 시절로 모든 것이 복귀하는 느낌이라고 합니다. 습득한 제2외국어는 급속도로 잊고, 음식은 어릴 때 경험한 그 맛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양로원에 어머니를 모셨는데 뵈러 가면 벽을 보고 앉아 애국가를 부르고 계시더랍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 갑갑함을 그렇게나마 해소하는 모양을 보고 뭉클했다고 합니다.     

저 역시 몇 년 동안을 한국 대학에서 외국인 교환학생을 상대로, 또 미국과 캐나다 대학에서도 영어로 강의했던 시절이 아득합니다. 지금 다시 하라면 절대로 못하지 싶습니다.


설이나 추석, 때마다 끈질기게 고향을 찾아가는 행렬이 조금 수그러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존재합니다. 한국만이 아니라 많은 나라가 특정한 날이면 고향을 찾습니다. 마지막 날이 가까우면 더 그런 마음이 들지 않을까 합니다. 요즘 유달리 ‘수구초심’(首丘初心)을 곱씹게 됩니다. 어서 제가 살던 굴(窟)이 있던 구릉(丘陵)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조국’(祖國)이라고 부를 나라가 있음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이 또한 지나가 버릴 상황인데 발이 묶여있습니다.      


태고부터 가을은 단풍이며 낙엽으로 가을의 모양을 유지했을진대, 땅과 사람의 모양새는 참 많이 변했습니다.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하늘과 구름, 낙엽은 어릴 때 보던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가을 조국의 그 정경 안으로 갈 날을 기다리며, 조금 더 여기에 감사하며 보내보려 합니다.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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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tn0vWqY7MzI&t=10s&ab_channel=%EB%B6%81%EB%9E%A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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