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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nChoi Dec 15. 2023

편지

-  하소연과 이정표 -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거친 들판의 한 복판에 너 홀로 마주 서서

정면으로 맞서 도전하라. 

용감하고 치열하게.     


끝없는 도전과 무한한 성취가 있을 것이다.

지적인 도전에 있어서 그러하다.

그것이 우리 자손에게 물려줄 유산이다.     


'타투'처럼 새겨진 지도교수가 보내온 편지의 한 대목이다.

성품처럼 글씨체도 깐깐하기 이를 데 없었다.         

'시조새'가 날아다니는 머나먼 옛날, 나의 석사과정 시절에는 한 학기에 2과목 이상 수강하지 않는 게 불문율이었다. 학위과정 학점을 이수하려면 꼬박 4학기를 다녀야 했다.

(혹 용감하게 2과목 이상 수강하려면 '네가 천재라도 되냐?' '이 공부가 우스워 보이냐?'는 빗발같이 쏟아지는 포탄에 맞아 장렬히 산화할 수 있음을 각오해야 했다. '나 때'에 그런 용자는 없었다.


순순이 4학기를 이수하고 1월 벽두에 결혼을 했다. 해외근무 중이던 남편은 결혼식 이틀 전 한국에 와서, 열흘 뒤 일터로 복귀했다. 나는 덩그러니 남편 없는 시댁에서 살았다. 

(아니 왜? 조선시대 전공하더니, 조선시대 여성이라도 된 것이냐? 친정도 코앞인데?)

내가 책 보다 슬슬 잠을 청해볼까 하는 시각에 시부모님은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셨다. 

(나는 올빼미 중에서도 상 올빼미, 시부모님은 아침형을 넘어선 새벽형 인간)


그 와중에 세미나에 참여하고 공부를 놓치는 않았지만, 학위과정으로 돌아갈 '내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남편이 돌아오고, 지방으로 발령받아 충주로 가고, 아이가 태어나고, '독박육아'를 했다.

장마에 오이 크듯 자라는 아이를 보며 내가 걸어갈 여러 갈래길을 놓고 곰곰, 매일 곰곰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을 거듭해도 들어선 학문의 길에서 나오면 평생 후회할 것이 분명했다.


아이가 놀이방에 갈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드디어 '때'가 왔다. 학업을 지속하겠다는 상소문 같은 손 편지를 8장에 걸쳐 써서 시아버님께 올렸다(아니, 정확히는 아버님 직장으로 우편발송했다). 나의 선택이 당신의 맏손주(=내 아들)와 장남(=내 남편)의 삶에도 영향을 주는 일인지라 적어도 반대는 피하고 싶었다. 무슨 내용을 8장이나 썼는지 기억나지도 않는다. 아마 남편에게 한 대사를 '복붙'했을 것이다. 나도 한 인간으로 성장하고 교육을 받으며 꼭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고, 그것은 학문을 계속하는 것이라는 하소연이었으리라.


논문학기를 등록하고 눈물겨운(?) 석사논문 초고를 지도교수에게 드렸다. 주사위를 던져놓고 기다리는 심정이란! 덜덜덜. 드디어 호출이 왔다. 더 덜덜덜.

지도교수는 그 특유의 깐깐하고 꼬장꼬장한 글씨체로 새카맣게 논평을 써두었다. 꼬불꼬불 화살표를 따라  뒷면으로 따라가 읽어야 하는 곳도 많았다. 거기에 턱! 하니 저 글귀가 있었다. 전체적인 논평과 함께. 

삶에서 고3 때, 대학3학년 때, 그리고 석사학위과정에 구름 사이로 나타난 스승의 이정표를  세 번 만났다. 


이제 달려오던 길에서 한걸음 비껴 섰다. 돌아보면 지도교수 말처럼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들판에 서있는 것 같았다. 정면에서 용감히 맞서라는 당부와 달리 철철 내리는 비를 맞고 울었다. 숨을 바위를 찾아 어슬렁거리기도 했다. 지도교수 말처럼 거친 들판에 나 혼자 뿐인 것 같았다. 그렇게 버티어 내면서 칼바람에 할퀴어진 상처도 있고, 폭풍우에 숨이 가쁘기도 했다.    

하지만 돌아보니 그것들은 모두 지나가는 바람이었을 뿐이다.


지금까지 항상 내게 머무는 것은 굵은 빗방울 사이사이에 나를 비추던 찬란한 햇살, 발걸음을 함께 하는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누가 앞서 가든, 달려가든, 공중을 날아가던 그는 그의 길을 가고 있을 뿐이니 나도 내 길을 잃지 않고 걸어갈 뿐이다. 삶의 들판에서 그 누가 세찬 바람과 거센 비를 피할 수 있으랴. 때로는 엄청 깊은 함정과 발이 빠지는 늪이 숨어 있을 수도 있다.  다만 햇살과 사랑이라는 신비를 믿고 오늘도 걸어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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