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내가 해외여행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 온 건,
한국인의 흔적이 덜한 곳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번 여정의 목적 중 하나가
아이들의 낯선 환경 적응이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한국인이 많은 신도심 대신 구도심을 선택했다.
구도심은 확실히 로컬 느낌이 강했다.
길거리 간판은 모두 중국어와 말레이어였고,
한국 음식점이나 한글 간판은 눈을 씻고 찾아도 없었다.
우리가 고른 숙소는 그 구도심 한가운데 있었다.
무려 70박 이상을 해야 했기에
신중하게 고른 결과물이었다.
하지만 모든 숙소는
살아봐야 단점이 보인다.
첫날밤, 새벽 4시쯤이었다.
멀리서 웅장한 기도 소리가 들려왔다.
모스크였다.
볼륨은 꽤 컸다.
예전 세네갈 시절의 기억이 떠오를 만큼.
(그땐 모스크 바로 옆에 2년을 살았다.)
그 시절의 PTSD가 살짝 스쳤다.
둘째 날 밤 10시 무렵,
어디선가 펑펑하는 굉음이 들렸다.
이어지는 배기음, 그리고 과속하는 소리.
한국에서는 배달의 민족과 함께
이미 사라진 줄 알았던 폭주족이었다.
알고 보니 말레이시아에는
‘멧 렘핏(Mat Rempit)’이라 불리는
밤거리 오토바이 레이싱 문화가 있었다.
젊은 층을 중심으로 퍼진 일종의 취미로,
밤마다 외곽도로에서 배기음이 울린다고 했다.
처음엔 ‘뭐 이런 곳이 다 있나’ 싶었지만,
며칠 지나니 나름 익숙해졌다.
그냥 오늘도 달리는가 보다 하며 잠을 청했다.
단점 2호까진 견딜 만했다.
하지만 냉장고에서 문제가 터졌다.
다섯째 날, 냉장실이 작동을 멈췄다.
어제까지만 해도 파릇했던 청경채는 흐물했고,
냉동실에서는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호스트에게 연락하자
“테크니션을 부르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약속한 오후 2시는 지켜지지 않았다.
결국 이틀 뒤, 오후 3시쯤 테크니션이 도착했다.
수리는 1시간 반 만에 끝났다.
그날 저녁 냉장고는 정상 작동했고, 다시 장을 봐왔다.
하지만 이틀 뒤, 냉동실까지 작동이 멈췄다.
벽돌 같던 냉동 두부는 순두부가 됐고,
냉동 블랙베리는 잼이 되어버렸다.
결국 호스트와 담판을 벌였다.
몇 시간의 협상 끝에, 7일 치 위약금을 지불하고 부분 환불을 받았다.
그리고 곧바로 숙소를 옮겼다.
이번엔 신도심 쪽으로.
모스크의 기도 소리도,
폭주족의 굉음도 없는 곳이었다.
무엇보다 냉장고가 두 배는 컸다.
70박 중 약 2주 만에 숙소를 옮겼다.
돌이켜보면 시행착오 치고는 꽤 비쌌지만,
그 덕분에 다음 숙소 선택엔 주저함이 없었다.
지금은 조용하고, 냉장고는 멀쩡하다.
이 정도면 성공적인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