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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리 Feb 15. 2019

<영초언니> 서명숙

그 때의 비현실 같은 현실, 현실일 수 밖에 없는 현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내가 일제시대 혹은 독재시대에 대학생으로 살았다면 어땠을까?

나는 투쟁을 위해 내 모든 것을 내 던지고, 사상을 신념을 지키기 위해 입에 담지 못할 끔찍한 고문도 다 이겨내는 유관순 혹은 이름 모를 대학생이 되어 나의 이야기가 영웅담이 되어 떠돌 수 있을까?


<영초언니>는 그저 막연하기만 했던, 들어도 실감이 나지 않던 70-80년대 유신정권, 군부독재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소환하고 그 속에서 잊혀 갔던 사람들을 영초언니를 중심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언젠가 한 번 쯤은 영화에서, 인터뷰에서 들었던 그때의 그 공기 -반지하 자취방의 오래된 책, 막 인쇄된 전단지의 잉크냄새, 총소리, 최루탄의 냄새, 지하실이었을 것 같이 햇빛도 허락하지 않았던 쾌쾌한 먼지의 냄새 - 속에서 느꼈을 고문을 당하는 자의 시각, 고문하는 자들에 대해 사인간적인 시각으로 그린 것이 인상 깊었다.

항상 고문에 대한 이야기는 불편하고 무서워하던 종잇장 같은 나의 감정이 너무나도 담담하게 읽혀나가기까지 했다.  어쩌면 그것은 내게 현실일 수 없는 그저 비현실 같은 현실이었기 때문은 아닐지 생각하며...


책 속에서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인물들이 변화하는 모습을 서술하고 있었다.

출소, 부모, 사랑, 결혼, 출산 등... 내가 아는 영웅들도 현실이라는 것에 부딪히고,  그 현실을 어떻게 버텨가고 이어나가고 있는지를 읽어나가며 나의 감정이 제대로 한번 구겨짐을 느꼈다.

어쩌면 내가 알던 유관순은 그녀의 엄마에게 공부나 하라며 등짝을 맞았을지도, 단순한 호기심에 옆 반 친구의 연필을 훔쳤을지도 모른다.. 그런 영웅, 아니 인물의 현실적인 이야기를 결혼, 이혼, 출산, 다단계, 사고로 현실일 수밖에 없었던 그 현실을 담담하게 이어나가며 이 이야기는 "불의한 국가권력과 맞짱을 떴던 당대 언니들의 이야기다"라고 말하는 작가의 말에 순간의 괴리가 느껴졌지만... 어쩌면 나의 괴리는 그저 좋은 것만 보고 싶고, 멋진 것만 알고 싶던 나의 무지함이 준 공백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 이건 세상의 어둠을 깨뜨린 눈부신 언니들의 이야기다.

어쩌면 그 언니들의 알고 싶지 않은 나약한 모습을 보았기에 더 눈부신 이야기다.

피박 받던 그 시대를 살며, 현실과의 타협도 스펙터클 했던 그 언니들이 만들어 준 지금을 나는 무슨 사명감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가..

언니들이 보기에 비현실적일 것 같은 이 현실을

큰 어려움 없이,

어쩌면 어려움을 묵인하며 비겁하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부끄러움이 느껴진다.




책갈피

120p. 난 애써 그녀의 눈길을 피했다. 언니와 함께 했던 수많은 순간들, 참으로 즐거웠고 풍성했고 때로는 심장이 터질 듯 긴장되던 순간들, 거기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 나의 수유리 시절은 이렇게 가는구나. 어쩌면 내 청춘이 이렇게 막을 내리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비겁해지기로 결심한 이상 내 영혼은 더 이상 청춘이 아니므로


154p. 그때 내 곁엔 아들애가 공부에 영 취미가 없어서 걱정이라며 내게 조언을 구하는 형사도, 입을 삐죽거리면서 시댁 흉을 보는 여경도 있었다. 그들은 내가 평범한 여대생으로 살아가던 때 마주쳤던 평범한 이웃들과 너무도 닮아있었다. 공포와 고문의 시간이 끝난 후 그들과 아무렇지 않게 일상적인 대화르 나누고 나면, 그들이 내 이웃과 보통 사람들이라는 사실이 과연 다행인지 불행인지 자문하곤 했다.    


185p. 편지를 읽어 내려가다가 참았던 눈물을 쏟으면서 대성통곡을 했다. 슬퍼서 흘린 눈물만은 아니었다. 이런 상화에서도 꽃을 사고, 그 꽃으로 위로받을 줄 아는 엄마의 강한 생명력과 풍부한 감성이 감사했다.


282p (혜자 언니의 최후 변론.. 중) 사실 이 법정에 오면서 든 심정은 비참하다는 것이었다. 유신 시절 탄압받고 매 맞고 하혈이 멈추지 않을 정도로 고문당하고 감옥살이르 하면서도 이토록 비참하다는 느낌을 받은 적은 없다. 독재정권 아래 겪는 일이어으므로, 오히려 떳떳하고 자랑스러웠다. 그러나 수십 년 세월이 흐른 뒤 그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뒤 그때의 일로 재심 법정에 서서 판결을 기다리는 심정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지경이다. 역사와 대중으로부터 버림받은, 배신당한 쓰라린 마음으로 나는 다시 이 법정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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