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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리 Dec 16. 2021

긍정주의자가 보는 프란츠 카프카

카프카의 몇 권의 책을 읽고..

 카프카, 프란츠 카프가는 내게 참 어렵다. 그를 알 수 있던 기회, 그를 알고 싶다는 얕은 열망이 몇 번이나 내게 찾아왔지만 깊숙히 다가가기엔 버거운 상대였다.

이번에도 야심차게 카프카의 <성>을 완독하겠노라 다짐했지만, 아직도 페이지는 머물러 있다. 애초에 한달을 잡고 읽었지만 그건 내 욕심이었나 싶다.


내가 카프카를 알게 된건 21살 때 였다. 그때의 남자친구와 연애를 할 때, 어느 날 그가 나에게 2권의 책을 건냈다. 나와 그는 비슷한 성향인 듯 싶으면서도 여러 면에서 달랐다.

우리는 늘 즐거웠고, 웃고 있었지만 마음에 품고 있는 색은 달랐다. 나는 무언가를 바라볼 때도 좋은 면을 우선으로 보았고, 해결은 희망, 사랑으로 채웠다. 굳이 내 눈을 밝은 색으로 표현한다면, 그는 조금 파란색이었다. 비판적인 시각을 주로 즐겼고, 늘 회의론적이고 의심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그런 내가 신기하다고 했고, 걱정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가끔 어젯 밤 쓴 시라고 보여주는 종이는 사실 그때 내게는 종이조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 그가 내게 건낸 책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 그리고 프란츠 카프카의 어떤 책이었다. 본인은 카프카들의 이야기가 좋다고 했다. 카프카들에게서 받는 영감이 좋다고 했다. 그 영감이 궁금해 반갑게 책을 읽었지만 <해변의 카프카>도, (그 시절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 숲>도 포기했었다) 나머지 한권, 프란츠 카프카의 책 역시 중도에 포기했다.


“읽어봤어?”

“아직…”


몇 번의 반복된 질문과 대답만을 남긴 채 그는 군대를 갔고, 나는 어느 한권도 제대로 읽지 못하고 헐거워진 고무신을 벗었다. 그게 나의 처음 ‘카프카’였다.

(지금 기억을 더듬어 보면 나머지 한 권 프란츠 카프카의 책은 <성> 혹은 <변신>이었던 것 같다. ‘K’라는 이름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프란츠 카프카


나에게 카프가가 왜 그렇게 어려운 걸까. 생각해본다. 특히나 카프카의 장편소설 <성>을 읽으며 더 이런 생각이 깊어졌다.

나는 그저 긍정적이고 싶은 사람이다. 슬픔, 절망의 순간이 오면 어떻게든 빛을 찾아 내고 싶어 한다. 회피를 선호한다. 때문에 그의 모든 책 저변에 깔려 있는 절망에 대한 정서가 내게 와 닿기 힘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설명이 필요하다.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좋아하지만, 그럼에도 설명되는 실마리가 있었으면 한다. 측량사 양반이 진짜 재고 싶은게 무엇인지. 누구하나 설명 없이 자기 말만 한다.

나는 실체가 필요하다. 소설이든 뭐든 읽다보면 머릿 속에 그림이 그려지기 마련이다. 읽으면 읽을 수록 멀어지고, 복잡한 미로조차 그려지지 않는다.


K가 성에 다가갈 수록 그 성이 멀어지듯이,

내가 카프카에게 다가갈 수록 멀어지는 듯 하다.



일상을 반복하며
부질없는 생각이나 하는 것이 인생이다.
- 프란츠 카프카

그럼에도 카프카를 갈망한다. 살다보면 수없이 긍정의 이름으로 승화될 수 없는 사람, 상황과 직면하게 되고, 이중적이면서, 아이러니한 벽들을 만난다. 인생의 답을 찾아다녔던 우리는, 자주 절망한다. 나이가 들 수록 그렇다. 나는 여전히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건 사랑, 희망이 답이라 여기며 살고 있다. 하지만 가끔은 복잡하게 얽히는, 질문으로 가득찬 상황이 많아질 수록 이 믿음 또한 도달할 수 없는 성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다시 카프카의 책에 도전해볼 생각이다.  한 10년 아니 20년에 걸쳐서 아마 더 긴 시간이 될지도 모를일이다. 어쩌면 하루 하루를 살아내야 하는 우리에게 부질 없는 열망, 질문일지 모른다. 하지만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내야 하는 우리라면, 그냥 어딘가에서 성을 찾아 헤매이는 것도 괜찮은 인생이지 않을까 싶다.





가시성성ㅇ라기 히로키가시라기 히로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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