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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리 Jan 16. 2022

불혹의 멋없는 돈 걱정.

 푹신한 베개에 머리를 파묻고도, 새벽 2시가 다 되도록 잠에 들지 못했다. 이따금 들리는 가습기의 잔잔한 물소리에 한참 귀를 기울일 뿐이다.


‘신은 인간에게 이겨낼 수 있는 시련만을 준다’ ‘우리는 일어나지 않을 일을 걱정하는 것으로 시간을 허비한다’ 어디서 들어본 말들을 계속 머리에 대뇌 인다. 하지만 오늘따라 이 몹쓸 걱정 회로는 쉬지 않고 더 활기차게 돌아간다.


걱정거리가 있다. 무슨 걱정이냐고 묻는다면, 선뜻 답을 하기가 좀 그렇다. 사실 나는 지금 ‘돈걱정’ 중이다. 돈이라는 녀석이 걱정과 함께 있으니, 괜스레 멋없어 보이기도 하다.



19살, 나는 무슨 걱정을 했던가.

원하는 대학에 가려면 턱 없이 부족했던 성적표를 손에 쥐고, 선생님과의 면담을 기다리는 그때. 내가 갈 수 있는 대학이 어디일지, 재수를 하는 게 맞을지에 대한 1차원적인 고민이 물론 있었다. 하지만 현실에 다가갈수록 ‘내가 원하는 인생의 과정이 대학에 있는 것인가’ ‘대학이란 무엇인가’ ‘교복을 벗고 만나는 세상은 어떨까’ 꽤나 근사한 걱정도 많았다. 결국 현실은 ‘재수’라는 결론으로 허무하게 결정되었지만 말이다.


20대 중반, 그때의 나는 ‘취업’이라는 문 앞에서 ‘겁 없는 걱정’을 했다.

공채시험은 줄줄이 떨어지고, 서류조차도 통과되지 않는 과정들을 수도 없이 겪었다. 어떤 날은 삼각김밥 하나로 배를 채워야 했던 날도 가득했지만, 나는 잡히지 않은 꿈에 대한 고뇌로 나름 멋지게 걱정을 포장했다.


30 초반, 사랑의 결말이 ‘결혼이라는 것일까. 나는 결혼을   있을까. 걱정했다. 하나씩 손에 쥐어지는 친구들의 청첩장은 괜스레 나의 걱정에 속도를 높였다. 운명,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 꽤나 진지하고 멋스럽게 고민했다.



40대의 문턱, 나는 ‘돈’을 걱정한다.

당장 눈앞에 해결해야 하는 이 ‘돈’이라는 걱정거리는

‘대출이 얼마나 될까…?’ ‘요즘 이자는 얼마나 해?’ ‘신용도는…?’ ‘중도상환 수수료는…?’

이 지극히 현실적이고도, 재미없고, 숨이 막히고, 멋도 없는 말들을 줄줄이 소환해온다.


이미지 출처 : 핀터레스트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를 새삼 소환해본다. 그는 많은 것을 누린 인생을 물론, 존재를 숨겨야 할 만큼 힘든 순간들도 겪었다. 덕분에 인생의 끝자락에 사람들에게 꽤나 진지한 생각과, 치열한 토론을 요하는 질문을 남겼다.


나는 지금 소유하고 있는 자본을 위한 치열한 걱정을 하고 있다. 비록 내 존재가 물질에 한참을 뒤따라 오고 있는 게 느껴지긴 하나, 이 또한 인생에 겪어야 하는 과정이라 생각해야지 싶다가, 문득 내 나이 40을 쳐다본다.


‘세상 일에 정신을 빼앗겨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는 나이’ 불혹.


이때 즈음이면, 철학적이고 깊은 삶에 대한 판단을 하리라 기대했는데, 여전히 세상 일에 정신을 빼앗겨 잠 못 들고 있다. 괜스레 이런 내가 멋없어 보여,

에리히 프롬이며.. 소유며.. 존재며.. 를 들먹거렸는데, 그 꼴이 우습기도, 안쓰럽기도 하다.

결국 급하게 손에 잡히는 걸로 덕지덕지 포장해둔 저 걱정 상자는 여전히 멋이 없다.


그냥 빨리 자고, 내일 은행이나 가보면 알겠지.

저 상자, 지금 그냥 발로 차 버리면 그만이다. 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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