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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리 Jan 23. 2022

어느 봄, 노래방에서의 추억

(1)

2000년 5월. 나의 17살 봄. 3년 내내 입던 낡은 교복 대신, 앞으로의 3년을 책임질 새 교복을 입은 산뜻한 봄의 어느 날이었다. 나는 여자고등학교에 입학해 나름의 쟁쟁한 경쟁률을 뚫고 방송부에 들어갔다. 군기 바싹 잡힌 어느 여자고등학교의 무서운 방송부였지만, 우리는 어느 봄날의 한 토요일을 손꼽아 기다렸다.


우리 지역의 각 고등학교의 방송부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연합 방송부’ 모임 시간.

우리 1학년 새내기 방송부원들은 언니들 몰래 이 날을 기다렸다. 다른 학교의 방송부원들을 만나는 시간. 특히나 연합 방송부에 오는 7개의 학교 중 남자고등학교가 4개나 된다는 소식에 열일곱. 여중을 거쳐 여고로 온 우리에겐 마냥 설렐 수밖에 없는 그런 이야기였다.


“너네 그날 화장하지 마라!”

“치마 줄이거나, 과하게 행동하면 바로 집합이다”

며칠 전부터 알게 모르게 하얗고 입술이 빨개지는 선배가 으름장을 놓는다.

“네!!!”

순진한 척 안경을 고쳐 쓰며, 언니들의 말에 침을 꼴딱 삼켰다.


드디어 그날이 왔다. 토요일 오전 수업을 마치고 학교 분식집 앞에 모여 함께 밥을 먹고 약속 장소인 YMCA로 함께 출발하기로 했다.

평소 같으면 8시 가까이 일어나 머리도 감지 않고 뛰어갔을 텐데, 이날은 7시도 안 되어 일어났다. 시간은 충분했지만, 움직임이 빠르다.

샤워를 마치고 머리를 말린다. 고데기 빗을 챙겨 드라이기를 한다. 안경을 벗는다. 눈앞이 캄캄해도 어쩔 수 없다.

‘용돈 모아서 이번엔 꼭 렌즈를 사야지…’


엄마의 방으로 몰래 들어가 메이크업 베이스를 찾는데,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다시 조용히 내 방으로 와 안경을 쓰고 다시 엄마 화장대로 조용히 다가가 민트색 메이크업 베이스를 손등에 쭈욱 짜고 나간다.

얼른 안경을 벗는다. 콧등에 안경 자국이 남지 않았는지 확인하고 티 나지 않게 조심스레 메이크업 베이스를 바른다. 손 등에 남은 민트색 덩어리를 샘플 통에 욱여넣어 가방 속에 짚어 넣는다.

살짝 색이 나는 니베아 립스틱을 입술에 바른다. ‘언니들이 보기에 티 나지 않는 화장…’ 이 정도면 되겠지 싶다.



몇 개 들지 않은 책 덕분에 가방이 가볍다. 대신 가방이 움직일 때마다 덜컥 거리는 안경 소리가 거슬린다.

‘오늘은 널 볼 일이 없을 거야.. 조용히 해..’

오전 내내 들은 3개의 수업은 집중하기 힘들었다. 적지 않은 키 덕분에 3 분단 뒤 쪽에 앉아 칠판이 보일 리 없었다. 사실 눈이 보인다 한들, 들리지도 않았테지만…


12시. 방송실로 모두 모였다. 찬찬히 우리를 살피는 언니들.

“야! 너네 둘! 왜 안경 안 썼어? 보여?”

“아… 네네.. 눈이 생각보다 안나 빠요..”

“…..”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둘러대고 우리는 간단히 밥을 먹고 회관으로 향했다.


큰 회관에 약 70명 정도 되는 7개 학교의 고1, 고2의 방송부원들이 모였다. 각자 돌아가며 인사를 시작한다. 너무 긴장한 탓에 내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안경을 벗은 탓에 저 멋진 목소리를 가진 남학생이 어떻게 생겼는지, 예쁜 목소리를 가진 저 여학생이 나보다 예쁜지, 알 길이 없었다.


각자의 소개가 끝나고 앞으로 1년간 연합 방송부에서 할 일들을 발표하며 회관에서의 일정이 끝났다. 눈앞이 뿌옇게 2시간을 보냈다.


이미 만난 적이 있는 2학년 언니 오빠들은 익숙한 듯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유독 우리 학교 언니들과 친한 남고가 있었다. 쭈뼛쭈뼛 우리와 그 남고 1학년들은 선배들 주변에서 1열로 한껏 각을 잡고 서 있었다. 아닌 척 서로를 한껏 의식하면서 말이다. 멀리서 언니 오빠들이 끄덕이며 우리에게로 왔다.


“끝나고 우리 쟤네랑 노래방 갈 거야. 너무 까불지 말고 조금 놀고 집에 갈 거야.”


늘 그렇듯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 오빠들의 뒤를 따라 총총 걸어갔다. 6명 우리 방송부원들은 팔짱을 끼고 수줍게 걸어갔다. 꼭 쥔 손이 따뜻했고, 우리는 피식피식 나오는 서로의 웃음이 새어 나오지 않게 더 꽉 팔짱을 꼈다.



큰 노래방이었다. 20명 남짓한 인원이 가득 들어찼다. 60분의 시간이 들어왔고 침묵이 감돌았다. 누가 먼저 이 정적을 깰지… 우리는 먼 산만 바라보았다.

물론 나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노래 가사를 읽으려면 이 20명을 뚫고 가야 할 텐데… 그럴 용기도 생각도 없었다. 어두운 노래방 조명 덕분에 내 눈앞은 더 캄캄해졌고, 가방 속 애꿎은 안경 통만 만지작거렸다. 이 어두침침한 노래방에 함께 앉아 있는, 오랜 시간 설레며 기다렸던 남색 교복을 입은 저들의 얼굴을 제대로 보고 싶다는 마음만 가득했다.


……

몇 분이 흘렀을까.

고2로 추정되는 누군가가 말했다.

“우리 신입들 노래 장난 아니야..! 야! A! 네가 스타트 끊어라!”

“넵!”

우렁찬 목소리로 그 애가 앞으로 나왔다. 큰 키의 남색 교복이 눈에 들어왔다.

늘 활기찬 번호 입력의 소리를 지나,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내게 익숙한 그 멜로디… 그 애가 첫 소절을 시작했을 때, 나는 가방을 열어 안경을 찾았다. 오늘 처음으로 모든 것이 또렷하게 보였다. 아니, 선명하게 A만 내 눈에 보였다.


2편에 계속


https://youtu.be/dKtiNUsb_-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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