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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리 Mar 20. 2022

내게 주어진 7일간의 자유

어느 날 신이 내게 말을 건다.

"열심히, 꾸역꾸역, 잘 살아가고 있는 너에게 7일간의 휴가를 주겠노라. 대신 꽤나 괜찮은 7일간의 플랜을 세워와야지만 갈 수 있다!"


회사에서는 끊임없이 1분기, 2분기, 3분기… 마케팅 플랜 보고서를 만든다. 이제 막 초등학생이 된 딸아이의 학원 스케줄은 기본이고, 학교에서 나눠준 1년 학사계획을 보며 방학이라는 저 긴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여름부터 겨울까지 나름 우리 집 플랜도 아직 진행 중이다.

그런데 내게 ‘7일간의 플랜'을 세워라...?  


'뭘 또 계획까지 짜요? 진짜 보내줄 것도 아니면서..

신의 목소리를 외면한다. 그러다 문득, 뭐 아예 불가능한 것도 아니고, 까지껏 그 계획 한번 세워보자. 신에게 이것저것 되묻는다.


"7일간의 휴가.. 그거 혼자 가는 거 맞죠? 아이랑 남편이랑 같이 안 가도 되죠? 연차에서 깎이나요?”

신은 답이 없다. 그인지, 그녀인지 모를 신에게 7일간의 자유시간에 대한 계획을 남긴다.


-

“7일 동안

 철저히, 오롯이 혼자 지내겠습니다”

이번 여행에는 아이도 남편도 없습니다. 친정 식구도 없고요. 물론 친구들도 없습니다. 철저히, 오롯이 저 혼자만의 여행을 떠나고 싶어요.

생각해보면 10년 전, 살았던 상도동의 작은 자취방 이후, 한 번도 혼자 잠을 자 본 적이 없습니다.

혼자 살 때는 밤이 무서워, 늘 TV를 틀어놓고 잤는데, 이제는 그러지 않습니다. 늘 남편이, 아이가 옆에 있습니다. 그렇게도 서글펐던 그 밤이 이제는 꽉 채워졌다 믿었어요. 근데 이게 참 웃긴 게, 이제는 그 서글펐던 밤의 고독이 이따금씩 그립습니다.

이번 7일은 그 밤의 고독을, 제대로 즐겨보고, 또 그리울 때 꺼내어 볼 수 있게 잘 담아오려 합니다.


휴대전화도 가져가지 않겠습니다. 꺼두면 켜보고 싶을 것 같아서 아예 가져가지 않을래요. 가족들이 많이 걱정할 수도 있겠지만,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이 7일 정도는 오차가 크지 않을 거라 믿어요.

매일 울려대던 카톡도, 회신을 바라는 아웃룩도, 반가운 택배기사님의 문자도, 수없이 울려대는 회사의 전화도. 잠시만 쉬어갈게요.


7일간 내가 연락이 없다고, 세상이 바뀌지 않겠죠. 사실 그 모든 알람들에게서 자유로워지는 걸 연습하고 싶어요.

알람들이 울리면 당장 보지 않아도 되고, 내 눈앞에 있는 것들을 먼저 해도 늦지 않을 텐데, 어느샌가 스마트폰에 노예가 되어버린 이 조급함을 할 수 있는 만큼 비워내고 가고 싶어요.

7일 간, 내가 대답하지 않아도 세상은 돌아가고, 소중한 내 사람들은 나를 기다려 준다는 걸 깨닫는 시간이 되고 싶어요. 저는 7일간 오직 나와 함께 여행하겠습니다



“7일 동안 매일매일

 해가 뜨고, 지는 걸 지켜보겠습니다”


여행의 장소는 어디 나라든 상관없어요. 기왕 가고 싶었던 파리나, 피렌체, 발리면 더 좋겠지만, 한국 어디여도 괜찮습니다. 북적이는 도심 속이어도 좋고 한적한 시골이어도 좋아요. 다만, 해가 뜨고 지는 걸 볼 수 있게 시야가 트인, 작은 정원이 있는 숙소였으면 합니다.


우리는 시계를 통해 시간을 살핍니다. 시계마저 없애볼까도 했지만, 그건 좀 무리겠고..

이 7일 동안은 해가 뜨고 지는 걸 살피며, 시간의 흐름을 자연을 통해 느끼고 싶어요. 주변 사람에게, 계속되는 일들에게 보여줬던 이 예민함을 자연에게 보여주고 싶어요. ‘해, 구름, 별, 달’ 하늘이 품은 것들과 ‘나무, 꽃, 흙’ 땅이 품고 있는 것들의 변화를 살피다 보면, 예민하고 소심한 이 피곤함이 여유롭고 평화로운 온유함이 되는 작은 밑거름이 되겠죠. 가능하다면 7일 안에 하루 이틀은 적당한 비도 내려주시면 좋겠어요! 아무튼 저는 7일 동안 자연을 느끼고 싶어요.


“7일 동안 4편의 책을 읽고,

5편의 영화를 보고, 6통의 편지를 쓰고,

7장의 일기를 쓰겠습니다.”


책.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트루먼 카포티 <티파니에서 아침을>

정현주 <우리들의 파리가 생각나요>


영화

<타이타닉>

<티파니에서 아침을>

<첨밀밀>

<러브 액츄얼리>

<그린북>


편지

- 평생 내 친구, 남편

- 또 다른 평생 내 친구, 딸

- 무조건 내 편, 아빠

- 또 무조건 내 편, 엄마

- 가깝고도 먼, 2살 많은 우리 오빠

- 그날 생각나는, 내 친구들 중 누군가.


일기

: 매일 아침 써 내려가는 나의 이야기.

한참 계획을 듣던 신은 짧고 굵은 한마디를 남기고 유유히 사라진다.

“아주 좋은 계획이네”

“그걸 누가 모릅니까?” 나는 대답 없는 그 또는 그녀를 향해 허공에 소리를 지른다.

7일간의 자유가 내게 허락될 리 없다.

나는 내일 또 회사 일을 해야 하고, 아이를 깨워야 하고, 말도 안 되는 넥타이 색깔을 고르는 남편을 살펴야 한다.

수십 번 울리는 스마트폰을 하루 종일 손에서 놓지 못할 것이고, 시들어가는 우리 집 초록이들을 그냥 지나칠 테고, 해가 언제 졌는지 모르고 저녁밥을 차릴 것이다.

나에게는 7일간의 자유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원대해 보이지만 작은, 당장 내일도 할 수 있는 그런 계획. 신이 말한 건지, 내가 말한 건지 모를 이 아주 좋은 계획은 그렇게 조금씩… 시작될 거라는 기분 좋은 느낌이 불현듯 스친다.


계획이 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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