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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리 Apr 17. 2022

선택과 선택이 만든 지금

  “여보세요? 와.. 우리 진짜 오랜만에 통화한다!

한국 언제 들어온 거야?”


  유난히 힘들었던 금요일 저녁. 남편과 아이는 보드게임을 하고, 엉망진창 쌓인 배달음식의 플라스틱 용기를 물에 헹군다. 싱크대 위에 올려둔 휴대폰에 누구보다 친숙했던 이름이자, 지금은 누구보다 낯선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우리는 대학시절, 아나운서가 되고 싶다는 같은 꿈으로 만난 친구였다. 좋아하는 책도, 즐겨 듣던 음악도; 가고 싶은 여행지도, 옷 입는 취향도 비슷했다. 털털하고 활발한 성격도 그랬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굴에서 풍기는 분위기까지 닮았었다.

같은 학교 친구들보다 더 많이 만났고, 서로의 자취방에 누워 미래에 대한 얘기를 자주 나눴다.

 우리는 뉴스를 진행하고, 세계 곳곳을 취재하며 세상의 이야기를 전하는 저널리스트, 아나운서가 되고 싶다 했다. 30살, 40살, 50살이 되어서도 우아하고, 당당한 목소리를 내는 그런 여자가 되자고 서로에게 약속했다.

 


 많이 닮은 우리는 같은 꿈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그 길에서 참 많은 갈림길을 맞이했다. 목적지가 같으니 끝까지 함께 하리라 믿었지만, 여러 개로 놓인 길을 맞이하며, 어느새 꼭 잡은 두 손을 놓고 각자의 길을 터벅터벅 걷고 있었다.


 우리는 여러 번 언론고시에서 낙방을 했다. 그 속에서 나는 일반 대기업의 마케팅 분야에도 함께 원서를 썼고, 친구는 전공을 조금 더 공부해보고 싶다며 대학원을 가겠다고 했다.


 친구는 매일 대학원 과제를 하느라 힘들다고 했고, 나는 잦은 야근과 회식 때문에 힘들다고 했다. 친구는 오래 사귄 남자 친구와 결혼을 해야 하는 건지 고민된다고 했고, 나는 이제 막 사귄 남자 친구가 영 아닌 것 같다고 했다.


 석사의 마지막 학기, 친구는 헝가리로 유학을 간다고 했고, 가기 전 결혼을 한다고 했다. 친구의 결혼식에서 가방을 들고, 옷을 챙겨주며, 공항까지 마중을 나갔다. 나는 막 대리로 승진했고, 친구는 남편의 친구에게 남자 친구가 없다며 잘해보라 했다.

 32세가 되던 해. 친구는 헝가리와 독일을 오가며 공부를 했고, 아이가 잘 생기지 않는다며 고민을 했다. 나는 만삭의 몸이 되어, 너도 곧 좋은 소식이 들릴 거라 위로했다.


  이따금 나는 아이의 사진을 보냈고, 친구는 한껏 드레스업하고 외국인들과 함께 있는 사진을 보냈다. 나는 또 아이가 이만큼이나 컸다고 말했고, 친구는 이국적인 학교의 풍경과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내며, 논문을 쓰는 게 쉽지 않지만 원 없이 공부할 수 있어서 기쁘다 했다.



친구는 독일에 터를 잡았고, 이따금씩 한국에 들어왔다. 최근에는 서울의 집값이 너무 비싸 공주에 집을 하나 구해 시간을 보내기로 했단다.

매일 아침 요가와 명상을 하고, 채식을 시작했으며, 칼럼을 쓰고 글도 조금씩 쓰고 있다고도 했다.


“참! 독일 집이랑 공주 집에 다 텃밭 만들었어! 미씽 기계 사서 요즘 옷도 만들어 보고 있다니까!

내가 농사짓고 옷을 만들게 될지 누가 알았어!

넌 어떻게 지내?”


나는 그럭저럭 잘 지낸다고 말했다.

 “애는 초등학생이 됐고, 매일 뭐 미친 듯이 오는 메일과 메신저에 답도 하고… 엑셀을 열어 실적을 정리하고…  그러다가 퇴근하면, 오늘 저녁은 또 뭘 먹나… 고민해… 화를 꾹꾹 눌러 담으며 아이 숙제도 봐주고, 책 읽어주다가 같이 잠들지… 그러다 새벽에 잠에서 깨면 저벅저벅 걸어 나와 어질러진 거실을 치우고, 멍하니 어둠을 빤히 쳐다보기도 하고…

그냥… 이렇게 보내..”


“자유롭고 여유로워 보이는 네가 부러워.”

잘 지낸다는 말이 무색하게 늘어놓는 신세한탄에 이어 부럽다는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가만히 내 말을 듣던 친구가 나에게 질문을 한다.


“너 예전에 임신했을 때

 매일 밤마다 본다고 했던 영화 기억나?

나도 네 덕분에 몇 번이나 그 영화 봤었거든!”


“응?? 아…! <If I stay>”


  만삭이던 시절, 배가 뭉쳐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어서 매일 밤 잠을 설치며 자주 영화를 봤다. 그중 10번도 넘게 돌려보던 영화가 바로 <If I Stay>.

영화가 대단히 재미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여주인공의 엄마, 아빠의 모습을 보며 곧 태어날 아가에게 나도 저런 부모가 되고 싶다는 생각으로 자주 영화를 보았다.


“그때 내가 아이가 태어나니 어때?라고 물었을 때 네가 했던 말 기억나?”

“음… 아니?”

“아이가 태어나서 휴직하고, 내 꿈이 잠깐 쉬어가지만 또 다른 모험이 시작되는 거라 생각할 거라고 그랬잖아. 영화에서 주인공 아빠가 자식들에게 그랬다고..! 잊었어? 난 그때 너의 그 말이 정말 인상적이었거든….

난 그때 내가 하지 못하는 모험을 떠나는 네가 정말 부러웠어. 이따금씩 네가 부럽기도 한데… 생각해보니, 나는 또 나름 내 모험이 있더라고… 그래서 이제 너를 부러워하는 감정보다는 내 선택을 존중하기로 마음을 바꿨어.”


친구와 전화를 끊고, 깊숙이 넣어두었던 그때의 외장하드를 꺼내, 노트북으로 다시 영화를 틀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언제부턴가 아이를 챙기기에 급급한 하루라는 피해의식에 잠식되어 있던 내게, 자유로워 보이던 친구가 괜스레 부러웠다. 뱃속에 아이를 기다리며, 다가올 새로운 모험의 설렘을 잊고 살았던 나를 향해, 그날 밤은 말없이, 하염없이 눈물을 흘려보냈다.


다시 참 많이 닮았지만, 다른 삶을 사는 듯한 소중한 내 친구를 떠올린다.


우리는 우리가 선택한 미래를 완성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수많은 갈림길에 서서, 우리는 나름의 방식으로 선택해서  자리에 왔다. 때론 즐겁기도, 슬프기도, 미친 듯이 싫기도 , 그런 순간도 찾아 오지만, 선택이 만든 시간에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지금 다른 인생을 살고 있지만, 그때의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여전히 닮은 구석이 많은 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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