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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리 Jun 26. 2022

다시 감사일기를 쓰기로 결심하다.

   2013년 겨울. 결혼 준비가 한창이던 때, 시아버님께서 다른 건 몰라도 결혼식에서 고향 동생이 주례를 봤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때까지 다녀본 결혼식에서 주례 선생님에 대한 좋은 기억이 없었고, 한창 주례 없는 결혼식이 유행하던 터라 나도 그럴 참이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훅 들어온 아버님의 부탁 같은 명령을 어길 수는 없었다.


  아버님과 함께 어느 한정식 집에서 주례 선생님을 처음 만났다. 까만 안경에 중절모를 쓰시고 들어오던 첫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아버님께서 우리를 주례 선생님께 소개했고, 선생님은 우리를 차례대로 쳐다보셨다.

몇 가지 질문들이 오가며, 대화가 무르익을 때 즈음, 선생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혹시 감사일기라고 알아요?”

“네?”


그때만 해도 감사일기라는 말이 생소했다. 감사와 일기라는 익숙한 단어들의 조합이 한 번에 이해되지는 않았다.


서로를 향해 멋쩍은 웃음만 보내는 우리에게

“감사일기는 어렵지 않아요. 매일 감사한 일 3가지만 적으면 되는 거예요..! “

“아…”

영혼 없는 리액션 끝에 선생님은 우리에게 느닷없이 협상카드를 꺼내셨다.


“나는 함부로 주례를 봐주는 사람이 아니에요. 결혼식 전날까지 서로에게 감사한 거 100개를 적는다고 약속해야만 봐줄 수 있어요”


당황한 우리를 대신해 아버님이 호탕하게 웃으며

“결혼할 애들인데 100개 없겠나! 300개라도 쓰라 해도 쓸 수 있겠지! 걱정 말게나!”

“하하하…”

그렇게 우리는 결혼을 두 달 남짓 남기고, 가장 바빴던 시기에 서로에게 감사한 100가지를 적어 주례 선생님께 제출해야 했다.



결혼식 전날까지도 나는 숙제를 완성하지 못했다. 바빴다는 핑계도 있었지만, 100개를 채우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짧은 연애기간에 있었던 일들, 결혼 준비하며 서운했던 일들, 좋았던 일들을 모두 떠올리며, 100개를 완성하는 순간.

그냥 이런 마음이면, 잘 살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느낌이 피어올랐다.

‘아… 선생님이 이걸 노리셨구나’

감사일기로 잠 못들 던 그날, 친정 엄마, 아빠에게도 수줍게 감사한 것들을 적어 편지를 썼다.

결혼 전날, 참 모든 게 감사했던 기억이 아직도 난다.


결혼 당일, 주례 선생님이 식장에 도착하시자마자, 100개가 적힌 종이를 달라고 하셨다. 결혼반지와 함께 고이 봉투에 넣어 둔 여러 장의 종이를 선생님께 건넸다.

 교수님께 과제 검사받는 학생 때처럼 긴장됐다. 아래 위로  훑어보시고는 다시 우리에게 주셨고, 옆에 있던 식장 관계자에게 주례 말씀 중간에 신랑 신부에게  마이크를 준비해 달라고 하셨다.

 읽기는 힘들 테니 나중에 1번부터 10번까지 읽도록 하세..”


그렇게 우리는 주례 말씀 중간에 서로에게 감사한 10가지를 읊었다.

남편의 감사 중

“술을 좋아하는 나보다 더 술을 좋아해 줘서 감사합니다”

라는 말에 식장이 빵 터졌고,

“우리 엄마에게 좋은 아들이 되겠다는 약속을 해줘서 감사합니다”

라는 말에 친정 엄마는 눈시울을 붉혔다.


주례 선생님은 긴 주례 말씀은 하지 않으셨다. 웃고 울던 우리의 감사일기를 묵묵히 들으시고는 우리에게 어떠한 상황이 와도 이렇게 감사할 줄 아는 마음만 있다면 뭐든 헤쳐나갈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이미지출처 : 핀터레스트



내가 닮고 싶은 사람 중 한 명이 ‘신애라’ 배우님이다. 배우의 모습도 멋지지만, 그녀의 에너지와 사람을 대하는 말투, 행동. 그리고 특히나 매일 가족끼리 감사일기 3줄을 쓴다는 말에 큰 감동을 받았다. 그녀의 웃음과 행동이 그 감사일기에서 비롯된다는 확신으로 그녀를 닮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했었다.


요즘의 나는 ‘힘들다, 괴롭다’는 감정이 얼굴에 그대로 묻어나고, 불안하다는 생각이 불현듯 계속 솟아오른다.

그 돌파구가 뭘까. 생각하다, 문득 감사일기를 읽으며 수줍게 웃던 내 모습이 생각났다.


나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는데, 또 잊고 살았구나! 불현듯 결혼식 전날의 감정이 떠올랐다.


  신혼 초, 서로에게 감사일기를 쓰다가 흐지부지 쓰지 않기 시작했다. 아이가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는 자기 전에 세 가족이 침대에 누워 서로에게 감사한 거 3가지씩 얘기하자고 하다가 또 흐지부지 없어져버렸다.


  나는 오늘부터 자기 전 다시 감사일기를 쓰기로 다짐했다. 나뿐 아니라 남편, 딸에게도 의무적으로라도 시켜볼 예정이다.(아마 처음에는 반발이 심하지 않을까 싶다)

이번에는 멈추지 않고, 우리 가족의 역사에게 가장 위대한 유산으로 남겨보리라, 굳은 다짐을 해본다.




+ 오늘의 감사

- 좋은 주례 선생님과 인연을 맺게 해 주신 하늘에 계신 아버님께 감사 인사 전합니다 :)


- 좋은 가르침 주신 주례 선생님께도 무한한 감사를 전합니다


- 마지막으로 오늘 밤, 이러한 생각을 글로 기록할 수 있게 건강한 책임감을 준, 인라이팅클럽 멤버님들께도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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