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겨울. 결혼 준비가 한창이던 때, 시아버님께서 다른 건 몰라도 결혼식에서 고향 동생이 주례를 봤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때까지 다녀본 결혼식에서 주례 선생님에 대한 좋은 기억이 없었고, 한창 주례 없는 결혼식이 유행하던 터라 나도 그럴 참이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훅 들어온 아버님의 부탁 같은 명령을 어길 수는 없었다.
아버님과 함께 어느 한정식 집에서 주례 선생님을 처음 만났다. 까만 안경에 중절모를 쓰시고 들어오던 첫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아버님께서 우리를 주례 선생님께 소개했고, 선생님은 우리를 차례대로 쳐다보셨다.
몇 가지 질문들이 오가며, 대화가 무르익을 때 즈음, 선생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혹시 감사일기라고 알아요?”
“네?”
그때만 해도 감사일기라는 말이 생소했다. 감사와 일기라는 익숙한 단어들의 조합이 한 번에 이해되지는 않았다.
서로를 향해 멋쩍은 웃음만 보내는 우리에게
“감사일기는 어렵지 않아요. 매일 감사한 일 3가지만 적으면 되는 거예요..! “
“아…”
영혼 없는 리액션 끝에 선생님은 우리에게 느닷없이 협상카드를 꺼내셨다.
“나는 함부로 주례를 봐주는 사람이 아니에요. 결혼식 전날까지 서로에게 감사한 거 100개를 적는다고 약속해야만 봐줄 수 있어요”
당황한 우리를 대신해 아버님이 호탕하게 웃으며
“결혼할 애들인데 100개 없겠나! 300개라도 쓰라 해도 쓸 수 있겠지! 걱정 말게나!”
“하하하…”
그렇게 우리는 결혼을 두 달 남짓 남기고, 가장 바빴던 시기에 서로에게 감사한 100가지를 적어 주례 선생님께 제출해야 했다.
결혼식 전날까지도 나는 숙제를 완성하지 못했다. 바빴다는 핑계도 있었지만, 100개를 채우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짧은 연애기간에 있었던 일들, 결혼 준비하며 서운했던 일들, 좋았던 일들을 모두 떠올리며, 100개를 완성하는 순간.
그냥 이런 마음이면, 잘 살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느낌이 피어올랐다.
‘아… 선생님이 이걸 노리셨구나’
감사일기로 잠 못들 던 그날, 친정 엄마, 아빠에게도 수줍게 감사한 것들을 적어 편지를 썼다.
결혼 전날, 참 모든 게 감사했던 기억이 아직도 난다.
결혼 당일, 주례 선생님이 식장에 도착하시자마자, 100개가 적힌 종이를 달라고 하셨다. 결혼반지와 함께 고이 봉투에 넣어 둔 여러 장의 종이를 선생님께 건넸다.
교수님께 과제 검사받는 학생 때처럼 긴장됐다. 아래 위로 쓱 훑어보시고는 다시 우리에게 주셨고, 옆에 있던 식장 관계자에게 주례 말씀 중간에 신랑 신부에게 줄 마이크를 준비해 달라고 하셨다.
“다 읽기는 힘들 테니 나중에 1번부터 10번까지만 읽도록 하세..”
그렇게 우리는 주례 말씀 중간에 서로에게 감사한 10가지를 읊었다.
남편의 감사 중
“술을 좋아하는 나보다 더 술을 좋아해 줘서 감사합니다”
라는 말에 식장이 빵 터졌고,
“우리 엄마에게 좋은 아들이 되겠다는 약속을 해줘서 감사합니다”
라는 말에 친정 엄마는 눈시울을 붉혔다.
주례 선생님은 긴 주례 말씀은 하지 않으셨다. 웃고 울던 우리의 감사일기를 묵묵히 들으시고는 우리에게 어떠한 상황이 와도 이렇게 감사할 줄 아는 마음만 있다면 뭐든 헤쳐나갈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내가 닮고 싶은 사람 중 한 명이 ‘신애라’ 배우님이다. 배우의 모습도 멋지지만, 그녀의 에너지와 사람을 대하는 말투, 행동. 그리고 특히나 매일 가족끼리 감사일기 3줄을 쓴다는 말에 큰 감동을 받았다. 그녀의 웃음과 행동이 그 감사일기에서 비롯된다는 확신으로 그녀를 닮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했었다.
요즘의 나는 ‘힘들다, 괴롭다’는 감정이 얼굴에 그대로 묻어나고, 불안하다는 생각이 불현듯 계속 솟아오른다.
그 돌파구가 뭘까. 생각하다, 문득 감사일기를 읽으며 수줍게 웃던 내 모습이 생각났다.
나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는데, 또 잊고 살았구나! 불현듯 결혼식 전날의 감정이 떠올랐다.
신혼 초, 서로에게 감사일기를 쓰다가 흐지부지 쓰지 않기 시작했다. 아이가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는 자기 전에 세 가족이 침대에 누워 서로에게 감사한 거 3가지씩 얘기하자고 하다가 또 흐지부지 없어져버렸다.
나는 오늘부터 자기 전 다시 감사일기를 쓰기로 다짐했다. 나뿐 아니라 남편, 딸에게도 의무적으로라도 시켜볼 예정이다.(아마 처음에는 반발이 심하지 않을까 싶다)
이번에는 멈추지 않고, 우리 가족의 역사에게 가장 위대한 유산으로 남겨보리라, 굳은 다짐을 해본다.
+ 오늘의 감사
- 좋은 주례 선생님과 인연을 맺게 해 주신 하늘에 계신 아버님께 감사 인사 전합니다 :)
- 좋은 가르침 주신 주례 선생님께도 무한한 감사를 전합니다
- 마지막으로 오늘 밤, 이러한 생각을 글로 기록할 수 있게 건강한 책임감을 준, 인라이팅클럽 멤버님들께도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