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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진짜였던 적이 있었을까?

성해나의 <혼모노>를 읽은 헛헛한 감정들의 기록

by 율리

성해나 작가의 『혼모노』를 읽는 동안, 나는 자꾸 멈춰선다. 불편하고, 아프다.
그런데 이상하게 가뿐하고, 웃음이 나고, 위로도 동시에 전해진다. 소설을 읽으며 이렇게 복합적인 감정을 느낀 게 참 오랜만이다.


이 책은 크고 요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대신 아주 조용하게, 일상의 균열을 따라가며 마음 속 가장 취약한 그 곳을 건드린다. 동시에 계속 말을 건넨다.

“이런 장면, 너도 봤지?
이런 감정, 너도 느껴봤지?”


『혼모노』에는 총 여덟 편의 단편이 담겨 있다. 어떤 이야기는 모성에 대한 피로를, 팬심과 정체성의 경계를,또 어떤 이야기는 과거의 상처와 기억을 들추어낸다.

다양한 사람들의 일상 어딘가에서 꾹 눌러 참아온 말들을, 다양한 인물을 통해 조용히 꺼내 보여준다. 각 이야기 속 인물들은 겉으로는 평온한 척하지만 속은 많이도 일그러져 있다. 곧 무너질 것 같은 벽 위에 앉아 무진장 애를 쓰고 있다.

그 안에서 질투, 미움, 외로움 같은 보편적 감정들이 섬세하고, 때로는 웃기게 포착된다. 그래서 이 책은 잔잔하지만 절대 가볍지 않다.


사실 나는 단편집을 그리 즐기지 않는 편이다.
하나의 책으로 묶여 있지만, 한 이야기가 끝날 때마다 분위기가 전환되는 것이 늘 낯설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은 다르다. 서로 너무도 다른 환경, 인물, 소재를 담고 있지만, 결국은 모두가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점에서, 어떤 미묘한 연결감이 느껴진다.

‘진짜는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지금의 나는 진짜인가?’
‘나는 믿을 수 있는 존재인가?’

이런 '나'를 향한, '진짜'를 향한 질문들이 소설마다 다른 옷을 입고 반복된다. 하지만 그 방식이 지루하지 않다. 오히려 매번 새롭고 신선하기까지 하다.
오타쿠 문화, 산후 우울, 온라인 커뮤니티, 가족 행사, 스타트업 회사, 연예인 팬덤…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해봤을 법한 장면들 속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을 대놓고, 혹은 우연히, 어깨너머로 발견하게 된다.


성해나의 문장은 조용히, 그러나 정확히 사람의 마음을 겨냥한다. 은은하게 비꼬고, 우아하게 지적하며, 감정의 본질을 꿰뚫는다. 사람을 다그치지도, 판단하지도 않으면서 “그 감정… 잘못 아니야”라고 조용히 말해주는 듯한 따뜻함도 있다.

특히 그 중에서 인상 깊었던 것은 세대의 다름이 만들어내는 미묘한 거리감, 그리고 그 안에서 점점 커지는 오해와 단절에 대한 작가의 시선이다.

이건 누가 틀린 게 아니라, 그저 다를 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까지의 그 어색하고 복잡한 시간들에 대한 이야기로 읽혀진다. 그 시간을 지나 우리는 어른이 되고, 때론 자신도 모르게 다른 세대를 밀어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태에 대한 맹목을 경계해야 함을 느낀다.
‘좋아 보이는 것’에 대한 집착,
‘진짜처럼 보여야 한다’는 강박,
남들에게 괜찮은 사람으로 남기 위한 끝없는 연기.
그 속에서 우리는 진짜 나 자신을 알아볼 수 있는 지혜를 잃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소설은, 문학은 언제나 정답을 주진 않는다. 하지만 대신 감정을 이입해볼 수 있는 여운을 남긴다.
『혼모노』라는 이 처음보는 타국의 단어에 쌓여있던 이 책에는 낯설지만 결코 지나칠 수 없는 이야기들이
신선하고 깊은 울림으로 남는다.


숨기고 싶었던 마음, 알 수 없었던 감정들—그래서 더 외면해왔던 그것들. 그 안에는 결국 피할 수 없이 마주해야 했던 나 자신이 있다.
사실 모르겠다. 무엇이 가짜이고, 진짜인지. 진짜 나는 무엇인지. 그리고 그걸 어떻게 구분하는 건지.
가짜처럼 꾸미고 싶지 않지만, 결국 다시 또 그렇게 될 것 같은 두려움.

그럼에도 이 책을 읽으며 소용돌이치는 감정들과 생각들이 괜히 반갑다. 진짜 오랜만에 신선한 문장에 마음이 두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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