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를 덫에 가두면』을 읽고
미국 드라마 <영 쉘든 시즌 2>에서 신실한 교인인 주인공 쉘든의 엄마는 지인의 아이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사건을 겪은 후 부터 신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매일 하던 식전 기도도 하지 않고, 교회에도 나가지 않는다.
“이 세상에 신이 존재한다면, 어째서 이런 일이 생기느냐며”며 절망하는 엄마에게 쉘든은 설명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생각을 엄마에게 전한.
“50억명 중 엄마가 내 엄마라는 건, 기적 같은 확률이야”
엄마와 달리 신념(Faith)보다 사실(Fact)과 과학을 믿어 온 쉘든. 신의 존재를 믿지 않던 아들이, 오히려 엄마의 믿음을 지켜준다. 팩트를 따지던 아이가, 설명할 수 없는 인연과 감정을 근거로 누군가의 신념을 붙드는 순간이었다.
얼마 전 읽고 좋았던 기억을 안고, 아이와 한번 더 읽고 있는 태 켈러의 『호랑이를 덫에 가두면』
이 소설을 읽으며 비슷한 생각의 결을 찾았다.
소설 속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과 믿음을, 이야기라는 소재를 통해 정교하게 복원해낸다. 주인공 릴리는 한국계 미국인 소녀다. 외할머니가 아프다는 소식에 가족들과 함께 이사 온 릴리는 어느 날 갑자기 호랑이와 마주치게 된다. 심지어 말을 하는 호.랑.이
그 호랑이는 할머니가 봉인해 둔 이야기들을 풀어달라고 말하며 과거의 비밀을 들추기 시작한다. 릴리는 두렵고 혼란스럽다.
‘이 호랑이는 진짜일까? 아니면 상실의 고통이 만들어내는 환상일까?’
작가는 이야기 속에서 환상과 현실,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진실이란 무엇인가’, ‘이야기란 어떤 힘을 지니는가’를 묻는다.
호랑이는 진짜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건, 릴리는 그 존재를 통해 외면하고 싶었던 과거의 기억, 현재의 두려움을 마주하게 되고, 그 속에서 용기와 치유를 얻었다는 것이다.
진실은 논리적이지 않다. 상실은 설명되지 않고, 슬픔은 측정되지 않으며, 용기는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데서 출발한다.
릴리가 호랑이와 맺는 거래는 결국 ‘이야기’와의 거래다. 입을 다문 가족의 이야기, 말하지 않았던 진실, 숨겨졌던 마음들이 이야기의 언어로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릴리는 비로소 현실을 오롯이 직면하게 된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믿는다는 것은 설명할 수 없는 것을 끌어안는 일’이라는 문장을 떠올렸다.
<영 쉘든> 의 쉘든처럼, 릴리 역시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서 고민한다. 그리고 결국 쉘든도, 릴리도, 둘 다를 선택한다.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을, 측정할 수 없지만 분명 느껴지는 것을 믿는 사랑 혹은 용기.
"순간이 부푼다. 나는 심호흡을 한다. 선택할 수 있는 결말의 종류가 아주 많다.
그리고 나는 나의 결말을 찾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서 여우가 전한 이 말이 뇌리에 스친다. 이 한 문장에 쉘든의 질문, 릴리의 여정,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며 경험하는 수많은 감정들과 맞닿아 있다.
사랑, 슬픔, 그리움, 용서, 연결. 그 어느 것도 눈으로는 볼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 알 수 없는 존재들을 조용히 믿고, 그 믿음 위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렇게 용기가 생기고 우리는 우리만의 결말을 찾는다.
릴리처럼, 쉘든처럼, 나 역시 설명할 수 없는 순간들을 지나오며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연습을 해왔던 것 같다. 눈에 보이는 것을 쫓기에 앞서,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존중이 결국 우리가 삶을 감당해내는 방식이라는 것을, 책과 이야기들은 언제나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가르쳐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