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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리 Jul 24. 2020

필사의 이유.

내가 필사를 하는 이유

남편과 결혼 전, 부산으로 여행을 갔다. 경상도에서 쭉 살아온 나는 사실 부산이 새로운 곳은 아니었기에, 강원도나 전라도를 희망했다.  하지만 그때의 남편은 부산을 고집했고, 그 이유는 여행 마지막 날 자신의 외할머니와 함께 식사를 했으면 하기 때문이라 설명했다.


아직 결혼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한 것도 아니었고, 서로의 부모님에게도 인사를 드리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웬 외할머니?'

조금 의아하기도 했다. 하지만 남편은 정말 자신에게 외할머니는 소중하고 좋은 분임을 강조했고, 그때의 나는 그걸 싫다고 할 명분도 없고, 워낙 연애 초기의 너그러운 마음으로 충만했기에 큰 반발 없이 동의했다.


2박 3일 부산 일정의 마지막 날.

정갈한 한정식 음식점에서 남편의 외할머니를 뵈었다.


나는 원래 할머니들을 좋아한다. 순수라는 단어와 하얀 머리의 조화를 그 어떤 사람들보다 잘 간직하고 계신 그런 분들. 남편의 외할머니도 그랬다. 백발 그리고 안경. 하얀색 카디건이 참 예쁘셨던 할머니. 할머니는 연신 손주에 대한 자랑과 사랑을 표현하셨고, 감사하게도 나도 똑같이 누군가에게 자랑스럽고 귀한 자식이니 서로의 만남이 참으로 예쁘다고 말씀해주셨다. 순수한 사랑과 동시에, 너그러운 마음까지 간직하신 내가 좋아하는 할머니의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계신 그런 분 이셨다.  


이듬해, 나는 그렇게 멋진 외할머니를 가진 남자와 결혼을 했다.  남편은 늘 홀로 부산에 계신 외할머니가 걱정되어 자주 전화를 드리곤 했다. 남편과 할머니의 이야기가 끝나면, 나도 전화를 이어받았고, 늘 어색한 통화의 시작은 "뭐하고 계셨어요?"였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셨던 할머니는 늘

"성경 필사 중이었어"

라고 차분히 말씀하셨다.


나는 그때 할머니가 왜 그렇게 성경을 필사하시는지 묻지 않았다. 그저 독실하신 분이니 그렇겠구나 생각했고,  

'팔 아프실 텐데 쉬엄쉬엄하세요'라는 말만 했다. 그렇게 통화가 끝날 때면 할머니는

'사랑한다. 늘 너희를 위해 기도한다'라고 말씀해주셨다.


결혼 1년이 채 되지 않아, 우리는 아이를 가졌다. 할머니에게 소식을 전했을 때, 차분하게 '감사하다. 아이를 위한 기도도 해야겠다' 말씀해주셨다. 그때 할머니의 그 말이 나에게 큰 위안이 되었고, 우리가 건강하게 아이를 품에 안을 수 있을 거라는 강한 확신과 믿음을 심어주셨다.


배가 조금씩 불러오던 어느 2월, 갑작스럽게 할머니는 세상을 떠나셨다. 그 날 새벽, 할머니의 위급한 소식을 들은 남편은 급하게 세수를 하다가 화장실에 주저앉아 서럽게 울었다. 나는 어떠한 위로도 전할 수 없었고, 그저 배를 부여잡고, 할머니를 위한 기도를 할 뿐이었다.

남편과 어머니가 올 때까지 다행히 할머니는 기다려주셨다. 손자는 그렇게 할머니의 마지막 길을 배웅해드릴 수 있었다.


장례를 치르고 유품 정리를 위해 할머니가 계시던 집으로 갔다. 작은 창문 앞 좌식 책상.

책상 위에는 스탠드, 십자가, 성경책, 손자들의 사진이 있었다. 그리고  책상과 침대 사이 하나하나 쌓아둔 성경필사 책.


손자들은 할머니의 성경필사 책을 나눠가졌다. 살아생전 할머니는 너희를 위한 기도, 삶의 지혜가 여기에 다 담겨있노라 말씀하셨다. 성경필사 책을 눈으로 보는 순간 그 말이 정말 그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나하나 정성스레 쓰인 글씨에 할머니가 보였고, 사랑이 들어 있었다.  이것을 쓰면서 할머니는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셨으며, 얼마나 많은 기도를 하셨을까.

할머니의 소중한 성경책과, 성경필사 책. 우리 집에서 가장 소중한 것 중 하나다.


우리는, 특히 할머니와 보낸 시간이 가장 짧았던 나는, 할머니가 온전히 가족들을 위해 남겨주신 필사를 가끔 들여다본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저 그 정성 가득한 글씨를 보고 있노라면 누군가가 나를 위해 기도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생각이 들 때면 그 어떤 두려움, 아픔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은 작은 용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느낌이 든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어느 날부터인가 나도 필사를 하고 있다. 할머니처럼 끈기 있게 하지는 못하지만, 책을 보다가 마음에 남는 글들을 노트에 차곡차곡 채우고 있다. 그리고 필사를 하며 딸에게, 남편에게, 그리고 또 다를 기억해주는 사람들에게 애정과 지혜를 나누고 싶은 마음을 조금씩 담아본다.



많은 책을 읽어서 보이는 유식함도 좋지만, 나는 살아생전 할머니에게서 느꼈던 그런 따뜻함을 풍기는 사람이 되고 싶다. 때문에 나는 필사를 좋아한다. 그리고 단순한 예찬을 넘어 꾸준히 실천하려 한다.


할머니가 나에게 알려주신 것처럼, 나의 이 필사가 누군가에게는 힘이 되고 나를 기억할 수 있는 흔적이 되길 간절히 원하면서 말이다.       


             

할머니의 흔적. 우리에게 큰 힘이 되고 지혜가 된다.
그리고 나의 필사(요즘 자유론 필사를 시작했다.) 나도 할머니처럼 꼭 따뜻한 흔적을 남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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