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파민의 시대, 잃어버린 리듬에 대하여

by 율리

요즘 나의 도파민은 넷플릭스 <셀링 선셋>과 유튜브 쇼츠로 채워진다. 하루가 끝나면 피곤하다는 핑계로 손끝은 자동적으로 그저 자극적인 스토리에 몰두하고, 15초짜리 짜릿한 영상들로 쉼 없이 나를 자극한다. 그 단순하고, 짧은 쾌락의 연속 속에서 '자극적이다'와 '멍하다'는 감각이 동시에 찾아온다. 도파민이 터지는 건지, 아니면 정말 뇌가 바보가 되는 건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다만 확실한 건, 화면을 끈 후에 남는 것은 그저 텅 빈 공허함 뿐이라는 사실이다.


예전의 나는 달랐다. 분기마다, 혹은 한 달에 한 번은 크고 작은 콘서트를 찾아갔다. 이문세님의 무대 위 여유로운 미소, 자미로콰이의 펑키한 리듬, 제이슨 므라즈의 따뜻한 멜로디, 그리고 10CM와 넬, 델리스파이스 등밴드들의 밤공기 같은 노래들. 그 공연들은 단순한 여가가 아니었다. 일상의 리듬이 흐트러질 때마다 다시 나를 제자리로 돌려놓는 '조율의 시간'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 리듬이 끊겼다. 마지막으로 간 공연은 6월 BTS 진의 솔로 콘서트였다. 그날의 함성, 무대 위를 채운 빛, 그리고 수만 명의 팬들과 나누었던 일체감. 그때 느꼈던 것은 단순한 '즐거움'이 아니었다. 그것은 살아있다는 감각 그 자체였다. 심장이 뛰고,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눈물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나는 깨달았다. 아, 이것이 진짜 도파민이구나.


생각해보면, 도파민에도 종류가 있다. 자극적인 스토리와 유튜브 쇼츠가 주는 도파민은 강렬하지만 금세 사라진다. 마치 사탕을 입에 넣는 순간의 단맛처럼, 순간적으로 혀끝을 자극하지만 삼키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 자극이 끝나면 남는 건 입안의 공허함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스크롤한다. 다음 영상을, 다른 자극을. 끝없이 더 강렬하게.


반면 콘서트의 도파민은 다르다. 그것은 아드레날린에 가까운 도파민, 새로움을 향한 에너지다. 한 곡이 끝날 때마다 마음이 차오르고, 낯선 사람들과 눈이 마주칠 때 전해지는 리듬이 뇌를 깨운다. 그 자극은 허무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다음 날까지, 아니 몇 주가 지나도 여운이 남아 삶의 활력이 된다. 문득 그날의 노래가 떠오를 때, 나는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가 미소 짓는다.


이것은 단지 나만의 감상이 아니다. 수전 매그새먼 『뇌가 힘들 땐 미술관에 가는 게 좋다』에는 콘서트가 우리의 삶을 실제로 변화시킨다는 연구가 소개되어 있다. 책에 따르면, 콘서트 관람이 행복감과 자존감을 높이고, 이러한 변화가 우리 몸의 면역력을 강화하고 스트레스에 대한 회복력을 키워 삶의 질을 높이고, 최대 9년의 수명을 늘린다고 한다.


수명 9년. 그것은 단순히 숫자가 아니다. 9년이라는 시간 동안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사랑하고, 얼마나 많은 순간을 기억할 수 있을까. 콘서트가 주는 것은 단순히 음악을 듣는 행위가 아니라, 함께 호흡하고 리듬을 나누는 경험이며, 그것이 우리의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드는 것일지 모르겠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콘서트에서 느낀 감정은 언제나 '온도'를 가지고 있었다. 겨울밤 야외 공연장에서 떨던 몸이 음악이 시작되자 뜨거워지던 순간. 여름 페스티벌에서 땀범벅이 된 채로 옆 사람과 어깨동무를 하고 소리쳤던 순간. 그 순간들은 단순히 음악을 들은 시간이 아니라, 내가 '거기에 있었다'는 증거였을 것이다.


지금 유튜브 쇼츠를 보는 나에게는 온도가 없다. 침대에 누워 스크롤하는 손가락만 움직일 뿐, 내 몸은 어디에도 가지 않는다. 하지만 콘서트장에 섰던 나는 달랐다. 조명이 꺼지고 첫 코드가 울려 퍼질 때, 나는 그곳의 공기를, 사람들의 숨소리를, 무대 위 열기를 온몸으로 느꼈다. 그리고 그 경험은 스마트폰 속 어떤 영상도 담을 수 없는, 나만의 기억으로 남았다. (요즘 참 많은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꺼내는데, 난 콘서트장에선 되도록 스마트폰을 꺼내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렇다면 나는 왜 지금 유튜브 쇼츠에 매달리는가. 아마도 내 뇌는 여전히 자극을 갈망하지만, 그 자극을 찾는 방식이 '수동적'이 되어버린 탓일 것이다. 손끝으로 스크롤하며 받는 자극은 즉각적이고 편안하지만, 그 안에는 '나'가 없다. 내 몸도, 내 리듬도, 내 감정도 진정으로 참여하지 않는다. 나는 그저 소비자일 뿐이다. 그것은 도파민의 노예가 되는 길이다.


반대로 예술은 능동적인 도파민이다. 콘서트의 함성, 미술관의 침묵, 한 장의 그림 앞에서의 깊은 호흡. 이 모든 예술적 경험은 뇌를 다시 '리듬의 상태'로 되돌린다. 그 리듬이 있을 때, 인간은 생각하고, 느끼고, 창조할 수 있다. 도파민이 파괴가 아닌 회복의 에너지가 되는 지점이 바로 거기에 있다.


"예술이 지나간 뇌는 훨씬 풍성한 삶을 산다."


그 말이 이제야 이해된다. 풍성함이란 많이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깊이 느끼는 것이다. 유튜브 쇼츠는 내게 수백 개의 영상을 주지만, 콘서트는 단 하나의 밤을 준다. 하지만 그 하나의 밤이 몇 달을, 때로는 몇 년을 지탱하는 힘이 된다.


내 뇌도, 나의 리듬도 이제 그 풍성함을 다시 찾아야 할 때다. 다시 콘서트에 가고 싶다. 수천 명의 심장이 동시에 뛰는 그 공간에서, 내 도파민이 아닌 우리의 리듬을 느끼고 싶다. 낯선 이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고, 같은 순간에 웃고 울며, 살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다.


그곳에서 비로소, 나는 살아 있다는 확신을 얻을 것이다.

그리고 그 확신이야말로, 어떤 15초짜리 영상도 줄 수 없는, 진짜 삶의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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