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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리 Nov 08. 2020

문학소녀

나의 인생 책에 대한 이야기

  고등학교 1학년,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을 처음 읽었다. 교과서였는지, 혹은 언어영역 문제집이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짧지만 강렬했던 단편을 읽어 내려가던 그때, 꽤나 진지하게 강한 느낌을 받았다. 반어적인 표현, 시대적 상황, 상징적 의미 등 시험을 위해 알아야 하는 그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때 나는 '김첨지'가 힘들게 끌던 그 인력거가, 방 안에 홀로 남겨졌던 아내가, 또 남겨질 아들이,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던 조선의 사람들의 알 수 없는 잔상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운수 좋은 날>이 준 '문학'과의 인연이 그렇게 시작된 것 같다.


  강렬한 여운이 뒤섞인 처음을 뒤로 한채, 나는 입시를 준비해야 했고 대학생이 되었다. 그리고 한껏 새로워진 환경에 취해 그 감정이 시작되긴 했는지 의심이 될 만큼 잊고 살아왔다. 고등학교 때는 의무적으로 교과서를 통해 문학을 접하기라도 했다면, 20대의 초반에는 너무 하다 싶을 정도로 책을 손에 들지 않았다. 어쩌면 이 두꺼운 전공서적들을 읽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잘 알아가고 있다는 오만, 자만으로 가득 차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꿈은 많았지만 철은 없었던, 그래서 만만했던 세상의 벽이 너무 버거웠던 취업준비생 시절. 그때의 (지금은 잘 지내는지도 모르는) 남자 친구가 내게 책을 선물했다. 다시 '문학'이 내게 온 재회의 순간었다고 할까.  




<문학의 숲을 거닐다>

  책 표지에 적힌 그 두 글자를 보는 순간, 바보 같이 눈물이 났다. 계속 떨어지는 취업이 서러워서 그랬는지, 문학을 좋아했던 17살의 내가 그리워서였는지, 그걸 잊고 지낸 내 자신이 부끄러웠는지, 눈물의 이유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이 책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는 기억은 분명하다.  


  이 책은 영문학을 전공한 저자, 장영희 교수가 문학을 소개한 칼럼을 모아둔 책이다. 사실 이렇게 문학, 책을 소개한 책들이 꽤나 많다. 세상에는 내가 읽지 못하는, 혹은 알지 못하는 책들에 대한 갈증을 많은 나는, 이런 종류의 책들을 가끔 읽어보았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개인적으로 저자가 알려준, 이 거대한 문학의 숲을 제일 좋아한다. 이 숲에는 우리가 들어본, 혹은 처음 보는 여러 국내외 소설, 시로 만들어진 나무들이 있다. 그리고 그 우거진 숲 가운데에는 평범한 일상으로 다듬어진 걷기 좋은 산책길이 있었다.

  일상 속에서 찾아지는 소설, 시. 그래서일까 이 문학들이 더욱 따뜻하게 다가오는 듯했다. 그렇게 나는 이 책을 통해, 잊고 있었던 '문학소녀'를 다시, 데리고 왔다.  




 책에서 소개된 책들을 사거나 빌려서 읽기 시작했는데, 첫 번째로 샀던 책은 라이너 마리아 릴케 Rainer Maira Rilke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작품이다.


"사랑은 우선 홀로 성숙해지고 나서 자기 스스로를 위해서,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하나의 세계가 되는 것"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중에서


이 책은 아주 얇다. 처음 이 책을 서점에서 발견했을 때, 두꺼운 책들 사이에 껴 있는 모습이 여려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읽을수록 스스로를 사랑해야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 주는, 그리고 가끔씩 그 사실을 망각할 때면 지금도 책을 열어 도움을 청할 만큼 강인한 존재였다.      


"릴케에 의하면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도 자격이 필요해서, 먼저 나 스스로의 성숙한 세계를 이루어야 한다. 언제부터인가 삶의 안일주의에 빠져 어려운 것을 피하고 나의 '고유함'을 잃은 지 오래고, 남을 위해 하나의 '세계'가 되기는커녕 여전히 옹졸한 마음으로 길을 잃고 헤매며 살아가는 나는 어쩌면 사랑할 자격조차 갖추지 못했는지 모른다"
<문학의 숲을 거닐다> 중에서



이때 즈음, 영화 <오만과 편견>을 보았던 기억이 난다. 그전에 원작을 책으로 접했었는데, 사실 나에게 있어서 <오만과 편견>은 영국판 신데렐라 스토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영화를 보고 나서도 연기, 영상미가 좋았지만 책을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문학의 숲을 거닐다>에서 이야기한 '편견'과 장애인으로 살아가는 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고 정말 크게 한 대 맞은 듯했다. 나는 그저 책을 보기만 했던 것이다. 한 번도 엘리자베스를, 그리고 그 시대를, 그리고 오만, 편견이라는 것을 그저 연인들의 그저 그런 사랑 이야기로 국한하고 이해하려 들지 않고 말이다.


그 뒤로 나는 다시 한번, <오만과 편견>을 읽었다. 그 후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 한 사람이 당연하게 제인 오스틴이 되었고, <설득>, <에마>, <이성과 감성> 등 그녀가 그리는 세상을, 사람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살아가면서 자꾸 '오만과 편견'의 표피만 키워, 나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나 보고 싶은 것만 보며 사는 어른들에게, 얼굴 색깔보다는 자전거 색깔을 보고 번지르르한 말보다는 마음을 들을 줄 아는 아이들의 반듯한 이야기가 새삼스럽다.
<문학의 숲을 거닐다> 중에서



  시간이 흘러 다른 책을 보기도 하지만 나는 꽤나 자주 이 책을 열어보았다. 그리고 내가 몰랐거나, 들어는 봤던 위대한 문학들 -<분노의 포도>,  <이방인>, <백경>, <호밀밭의 파수꾼>, <유토피아> 등- 을 이 책을 통해 다음 읽을거리들을 확장해 나갔다. 그렇게 나는 어느새 어엿한 직장인이 되었고, 마케터가 되어 있었다.


 가끔 마케팅에 대한 답이 떠오르지 않을 때, 마케팅 전문서적을 들여다본다. 하지만 그 보다 이 책을 열어 내가 미처 읽지 못했던 시나 소설들을 읽고 나면, 이상하게도 아이디어가 잘 정리가 되는 기분이 든다. 그리고 아이를 낳고 다양한 육아서를 접하고, 실천하려 노력하고 있지만, 진짜 해결하지 못할 위기에 봉착하면 나는 또 문학의 숲에서 미처 앉지 못한 나무 그늘이 있는지를 살펴본다. 그리고 그 밑에서 잠시 숨 돌리다 보면, 육아서만큼 시의적절한 정답은 아닐지언정, 지금 나를 돌아볼 반짝거리는 실마리를 발견하기도 한다.  


 어쩌면 그게 마케팅이며, 육아며, 내가 고민하는 모든 것이 곧 인간에 의한 것이기 때문은 아닐까. 다시 말해 내가 이루고자 혹은 해결하고자 하는 일들에는 사람을 이해하는 능력이 가장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문학은 일종의 대리 경험이다. 시간적. 공간적. 상황적 한계 때문에 이 세상의 모든 경험을 다 하고 살 수 없는 우리에게 삶의 다양한 경험을 제공함으로써 시행착오 끝에 '어떻게 살아가는가', '나는 누구이며 어떤 목표를 갖고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가'에 대해 새롭게 깨닫게 한다. 그러므로 문학을 통해 우리는 삶의 치열한 고통, 환희, 열정 등을 느끼고 감동한다. 정신적으로 자라나고 삶에 눈뜬다는 것은 때로는 아픈 경험이지만 이 세상을 의미 있게 살다 가기 위해서는 꼭 겪어야 할 통과의례이다."
<문학의 숲을 거닐다> 중에서


 사실 지금도 세상이, 사람이 어렵고 내가 적어 내려 가는 나의 모습들 속에는 모순으로 둘러싸인 부족한 행동들이 있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문학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다. 그렇게 짝사랑하는 마음을 가득 담아, 문학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고, 다양한 삶을 이해하고 싶어 하는 나를 응원해주고 싶다.


 그래서 어쩌면 나는 수줍게 이 책을 '인생 책'이라 쓰고 '인생 책의 시작'이라 읽어주길 바라본다. 그리고 평생 이 책을 가장 손이 잘 닿는 곳에 둘 것이다. 이 안에 있는 모든 문학을 읽고, 그 속에 모든 사람들의 삶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그러다 보면 내가 좋은 무언가를 누군가에게 줄 수 있지 않을까.   



  문득 꼭 <운수 좋은 날>을 읽었던 17살의 내가 보인다. 식어가는 설렁탕 옆에서 흐느끼는 김첨지에게, 괜찮은지, 힘내시라고 말을 걸고 싶었던 내가 말이다








<그냥, 여담>

이 책의 표지를 넘기면 의도적으로 찢긴 자국을 보니 웃음이 나온다.


이 책을 선물해준 남자 친구와 이별을 맞이했던 28살 어느 날, 나는 그가 줬던 모든 선물을 버렸고, 남김없이 사진도 다 지워버렸다. 이 책도 그 분노의 대상이었지만, 나는 이 책은 버릴 수 없었다. 분노를 억누르며 내가 찾은 방법은, 그 친구가 메시지를 적었던 첫 장을 찢는 것이었다.    


얼마나 화가 났으면, 그리고 얼마나 이 책이 소중했으면 그랬을까. ^_^

예쁘게 찢겨진 책의 첫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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