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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리 Nov 23. 2020

시간의 노예입니다만,

주말 아침 8시. 딸아이는 신기하게도 알람도 없이 일어나 나를 깨운다.

"엄마, 벌써 햇님이야! 커튼에 해님 줄이 생겼어! 봐봐!"

"응....."

딸아, 사실 엄마는 커튼 사이로 비추는 햇살이 아니어도, 늘 그렇듯 눈 뜨자마자 찾는 저 시계의 바늘이 '8'을 가리키는 것만 봐도 해님이 우뚝 솟아 오른 걸 안단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지는 시간, 주말의 하루는 이렇게 시작된다. 목마르다, 배고프다는 남편과 딸에게 빵, 과일을 내어준다. 평화롭게 울려 퍼지는 라디오에서 클래식이 흘러나온다. TV를 볼 시간이라는 딸에게 영혼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식탁의자에 걸터 이미 식어버린 커피를 홀짝 거린다.

 

 올해는 특히나 이런 주말 같은 날이 많았다. 아이가 깨는 오전 8시부터, 잠드는 밤 9시까지, 하루의 반을 넘기는 이 긴 시간을 온전히 아이와 할 날이 많았던 한 해. (그리고 또 그렇게 될까 봐 두렵다...) 하루 종일 집안에 혼자 있을 아이와 놀아주는 건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아이의 기본 욕구를 챙겨줘야 하고 생산적인 활동을 권장해야 하고, 유희에 동참해야 하고, 타협하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다시 말해 하루 종일 부모는 이성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쉽지 않다. 엄마 이거 할까? 배고파요! 엄마 심심해요! 뭐하고 놀까? 더 보면 안 돼? 이런 말을 듣고, 답해주다 보면 이성은커녕, 애써 숨겨온 분노의 감정이 몇 번이고 올라온다.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면, 그걸 넘어설 수 있는 운명 같은 것들도 있기 마련이다.

그 힘든 감정의 널뛰기를 지나, 우리는 주어진 시간을 쪼개어 계획하는 나름의 해결책을 만들었다. 즉 동그란 시간표 안에 우리는 시간표라는 것을 만들었다. 밥은 여유롭게 1시간을 먹기로 했고, 유튜브는 2번을 쪼개어 보는데 40분은 넘기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몇 시간은 같이 그림을 그리기로 했고, 1시간은 방에서 자유롭게 혼자 놀기로 했다. 아이와 나, 그리고 그 어떤 사람에게도 똑같이 주어지는 이 시간을 미리 계획하여 즐겨보기로 했다. 


물론, 이 시간들이 아이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시간표이다. 때문에 물리적인 시간의 공평함과는 달리 구성적인 면에서는 내게 불리한 면이 많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불완전한 아이를 챙겨야 하는 부모이고, 이런 것을 성찰할 수 있는 복잡한 뇌 구조를 먼저 그리고 사는 어른이니 그건 너그러이, 당연히 감안해야 한다.


아직 시계를 못 보는 아이를 위해, 타이머를 준비했다. 우리가 행동하는 반경에 타이머가 놓여 있는데 나는 사실 그 줄어드는 숫자의 움직임을 초 단위, 분 단위로 쳐다본다. 아이와 함께 게임을 하는 동안, 주사위가 어떻게 굴러가는지 보다 왜 저 숫자는 줄어들 기미가 없는지에 집중했고, 그다음 있을 아이의 TV 보는 시간에 뉴스를, 인스타를 봐야겠다는 생각만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아이는 달랐다. 자신의 주사위에 따라 말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엄마의 말이 더 빨리 가면 그 작은 주사위에게 이번에는 꼭 6이 나와야 한다며, 세상 누구보다 간절하게 기도했다. 아이에게는 타이머의 존재도, 시간의 흐름도 중요하지 않았고 그저 게임판 위를 구르는 주사위와 말들에게만 집중했다. 


"진정한 탐험은 새로운 땅을 찾는 일이 아니라 새로운 시각을 얻는 일이다"
 -마르셀 프루스트


 휴대폰으로, 시계로 하루에도 수십 번도, 어쩌면 수백 번도 넘게 시간을 체크하는 나를 발견한다. 20분, 30분, 시간이 가는 것을 그냥 지켜보지 못하는 나를 말이다. 


 사실 우리는 똑같이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든 쪼개어 써야 하는 슬픈, 시간의 노예로 살아왔고 또 그게 당연한 듯 인식하는 지금을 사는 '현대인'이다. 하지만 그러다 보면 똑같이 주어진 그 공평 하디 공평한 시간이라는 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아니 벗어날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어쩌면 그 땅에서 무언가를 일궈낼 수 있고, 새롭게 꽃을 피울 수도 있고, 이 땅 밑에는 신기한 동물들이 살지도 모르는데 우리는 그걸 볼 수 있는 기회조차 놓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나도 딸아이처럼, 그 게임판을 구를 주사위에게 시간을 잊을 만큼 간절함을 보였다면 내가 몰랐던 나의 생각을, 시각을 발견할 수 있지는 않았을까? 


이제 나는 육아와 업무를 병행해 나가는 워킹맘으로 돌아왔다. 이제는 어쩔 수 없이 또 시간에 쫓기게 되고 시계를 더 자주 챙겨봐야 하는 나로 돌아온 것이다. 다만 나는 딸과 함께 시간표를 짜고 타이머를 맞추며 어렴풋이 새로운 깨달음을 알았다. 분명 힘들겠지만, 나는 시간의 땅에서 일어나 일단 주변을 둘러보려 한다. 똑같은 시간에서 집중력을 높여보고, 몰입이라는 것을 해보고, 일희일비의 감정을 조절 해나가 볼 것이다. 어렵겠지만 그래야 한다. 시간은 변명의 여지없이 너무 딱, 공평하기 때문이다. 


일단 먼저, SNS 알람부터 꺼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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