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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리 Nov 15. 2020

2020년 11월

난 무엇을 기대했을까에 대한 이야기 with 존 윌리엄스 <스토너>

2020년, 거짓말 같이 11월이라는 숫자를 만났다. 올해는 나에게 특별하다. 어렵게 얻는 1년 동안의 쉼, 아이와 함께하는 휴직을 위한 특별한 한 해를 계획했던 시간이었다. 하지만 뒤를 돌아보니 왜 이렇게 허무한 마음이 남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꼭 그게 올해가 아닐지라도 11월만 되면 그렇게 한 해를 돌아보며 우울해하는 것이 매년을 돌아보는 나의 나약한 습관이다. 하지만 그게 코로나라는 불가항력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것일지라도, 특별히 준비했던 2020년 이기에, 결국에 또 나는 무엇 하나 이루지 못했다는 생각이 특히나 강하게 다가왔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나는 올해 괜찮은 책들을 많이 읽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가 <스토너>라는 이 책으로 눈길이, 생각이 되돌아 간다. 


 윌리엄 스토너. 1960년대, 그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자연스럽게 농부의 길을 준비하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하지만 문학의 매력에 빠져 영문학 교수가 된다. 그 속에서 가정을 이루고, 학교에서 자리를 잡아가지만, 그 속에서의 크고 작은 갈등들을 겪는다. 어쩌면 너무 순수하고 진지했던 그는 그 모든 갈등을 자초한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도대체 왜 가만히 있는 건지 답답한 그를 마주하는 내내, 나는 알 수 없는 위로를 받고 있었고, 지금까지도 그가 곳곳에 남아 있다. 그래서 지금, 11월의 허무함으로 잠식될 것 같은 나는 다시 스토너를 펼쳐 들었고, 그가 했던 질문을 써 내려가 본다.


"넌 무엇을 기대했나?"

나는 무엇을 기대했던 걸까. 아이와 많은 곳을 여행하고, 특별한 곳에서 살아보고, 사진을 찍고, 누가 봐도 꽤나 괜찮을 것 같은 순간들을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힘들게 얻은 시간을 보상받고 싶었고, 누구보다 멋지게 그려내고 싶었다.


 하지만 사진 속에 남겨진 나와 아이는 대부분 책장이 있는 거실에 있었다. 시간이 흐름과 함께 책장의 책도 차곡차곡 쌓여갔고, 우리는 꽤나 많은 시간을 함께 읽어왔다. 코로나가 잠잠해져 다시 유치원에 갈 때면, 그렇게 커피를 마셔댔고, 또 책을 읽었다. 아이가 잠들면 영화, 드라마, 예능 미친 듯이 TV도 보았다. 그러다가도 또 책을 읽었다. 그렇게 새로운 곳에서, 내세울만한 경험을 해야만 무언가를 했다고 믿었던 나는, 그저 이 곳에서 읽고, 쓰고 그렇게 2020년을 지나왔다.



 더 이상 우울하지 않다. 기대했던 것들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아도 나는 긴 시간 동안 아이와 함께 일상을 살았고, 책을 읽었다. 그리고 책 속에서 함께한 많은 사람들을 통해 사유할 수 있는 시간을 그 어느 때보다 많이 가졌다. 그리고 매년 허무한 나의 11월에 이런 꽤 멋진 생각으로 채워나가는 것만으로도 나는 우울할 필요가 없다.


 그렇게도 평범했던 윌리엄 스토너가 관조하던 그의 세상 속 문장들을 써 내려가며, 나도 이제 내 세상을 따뜻하게 바라볼 준비가 된 것 같다. 올해 나는 그거면 충분하다.




+

<스토너>의 책을 읽고 있으면, 원태연의 시 한 구절이 계속 따라온다.

'내가 태어나던 날의 하늘은 어떤 색깔이었을까'
-원태연, <눈물에 얼굴을 묻는다> 중


이 문장을 참 좋아한다. 처음 이 문장을 읽고 나를 둘러싼 세상의 색깔, 공기를 인지한다는 것에 대해 매력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을 글로 담을 수 있을 거라 생각지 못했는데, <스토너>를 읽는 내내 주인공이 공부하는 강의실, 걸어가는 교정, 그리고 그의 찬란했던 순간들에 하늘의 색깔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만큼 이렇게 섬세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진 문장 하나하나가 정말 예술이라는 것을 꼭 전하고 싶다. 어설프게 시의 한 구절을 소환했지만, 이 글을 읽고 <스토너>를 보게 될 누군가가 그가 서 있는 하늘의 색깔을 어렴풋이 보게 된다면 더없이 기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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