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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리 Jul 21. 2021

운명이란 무엇일까?

소포클레스 <오이디푸스 왕>을 읽고, 쓰고, 써봄.

 "셰익스피어의 비극, 책으로 읽어보셨나요?" 라고 누군가 물으면 말문이 막힌다. 일단 스토리는 너무 친숙하다. 분명 고등학교 때 한번 읽어도 봤고, 대학교 때는 토론도 해봤다. 생기발랄 나의 그 시절, 셰익스피어의 비극이 담긴 책은 가까이하기엔 멀었다.

'너무 내용이 자극적이야... 오글거리는 대사.. 어쩌라는 거야..'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를 외치기엔 그때 나는 세상이 참 재미있었나 보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그저 디카프리오의 잔상만 남아있었다. 한번 그렇게 멀어진 셰익스피어의 비극. 그저 내게는 남들이 말하는 세계적인 작품일 뿐이었다.



*

 40살의 문턱에 서 있는 지금, 나에게 현실은 10대, 20대보다는 잔잔하다.그렇다고 마음이 편하거나, 고민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어린 날의 나는 성낸 파도를 즐기는 서퍼 같았다면, 지금은 잔잔한 호수에서 우아하게 바쁘게 발을 구르고 있는 백조 같다고 해야 할까. 이루워야 할 것들보다, 눈앞에 지켜야 할 것들이 더 많은 나이. 주변보다는 과연 나는 누구일까가 더 알고 싶은 지금. 갑자기 그게 왜 '고전을 읽어야겠다'라는 결론으로 마무리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어느 날 그렇게 고전을 꺼내 들었다.


 고전 중에서도 특히 희극&비극은 내게 가벼운 트라우마가 있는 분야다. 10대, 20대의 기억이 강렬해서 거부감이 들었던 이 장르를 읽는다는 결심은 쉽지 않았다. 그것도 셰익스피어보다 한 단계 더, 올라간 '비극적 영웅의 창시자,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이었기에 읽기 전의 부담은 꽤나 컸다.



*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오이디푸스 왕의 비극 이야기.

 비극의 시작은 이렇다. 한 나라의 왕이, 나라에 닥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그 근원을 찾아 나선다. 그 해결책은 선왕을 죽인 자를 찾아야 하는 것인데, 그 살인자를 찾아가는 과정을 수사극 형태로 보여준다. 내용은 알고 있지만 읽어내려 갈수록 숨통이 조여 오는 느낌이다. 결국엔 범인을 잡겠다고 칼을 빼 든 본인이 범인이다.

 그는 자신에게 내려진 운명을 벗어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쓰고 여기까지 왔지만, 결국엔 스스로 비극적인 운명의 문턱까지 제 발로 걸어온 것이다.


 막장. 우선 오이디푸스의 운명, 신이 정해버린 그의 삶 자체가 막장이다. 이 신탁을 듣고 가만히 있을지가 누구란 말일까. 정해진 비극적 결과를 거스르기 위해 오이디푸스, 그의 부모들 또한 엄청난 노력을 했다.

 낳자마자 자식을 죽이고 싶은 부모가 어딨을까. 하지만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근친상간이 예견되어 있는 아들의 운명 앞에 자식을 죽이기로 한다. 그리고 (그저 내 생각이지만) 일말의 모성, 부성으로 인해 차마 자기 손으로 죽이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살인을 명한다.

 임무를 받았지만, 어린 생명을 죽일 수 없는 양심, 연민이 발동해 명을 받은 사람 또한 몰래 아이를 살려 준다. 그리고 그 운명의 중심에 서 있는 오이디푸스. 그는 자신이 범인일지 모른다는 사실이 좁혀짐에도 불구하고 진실은 무엇인지, 내가 누군지 알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사건을 더 깊이 파고든다.어쩌면 충분히 막을 수도 있을 것 같았던 신탁. 그 무시무시한 운명은 그 속에 놓인 인간들의 의지로 결국엔 그렇게 되고야 말았다.


 운명은 무엇일까? 운명을 이루는 것은 무엇일까? 그저 태어날 때부터 안고 태어나는 벗어날 수 없는 굴레일까? 혹은 내 의지, 욕망의 완성일까. 결국엔 오이디푸스의 운명은 정해져 있다 한들, 그 안에는 크고 작은 욕망의 결과라는 생각이 든다.



테이레시아스 : "당신은 당신의 운명, 나는 내 운명을 견디는 것이 가장 손쉬운 일이오"


테이레시아스의 조언대로, 그때 그를 집으로 보냈더라면, 어땠을까?
하긴.. 진실은 무엇이며, 나는 누구인지 알고 싶은 것. 그 욕망, 의지는 꺾을 수 없을 테니, 조금 돌아갈 뿐 결국엔 알았겠지


 나는 사주를 보거나, 타로를 보는 걸 꽤 즐긴다. 신년에는 무조건이고, 큰일을 앞두고는 타로를 본다. 이렇듯 사주, 타로에 빗대어 미래를 알고 싶어 하는 이유 중 하나는 어느 정도 운명은 정해져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다만 오이디푸스의 끔찍한 운명이 그려진 고대 그리스와 달리, 지금의 우리는 신의 존재가 불변의 진리처럼  모두에게 납득되지는 않는다. 더군다나 신탁이라 모두가 믿을 만큼 백발백중의 용한 테이레시아스 같은 사람도 없다. 그리고 비슷한 운명일지 언정, 그건 해석하기 나름이니 말이다. (가령 역마살이 있다고 하면 옛날에는 좋지 않은 걸로 여겼다면, 이제는 여행을 많이 다니고 해외에서 근무할 운명으로 여겨지고, 도화살 역시 누구나 선망하는 연예인이 될 운명이라고 해석하는 것처럼..)


지금의 우리는 운명을 알 수 없다. 죽는 순간까지도 내 운명이 무엇이었는지 모르고 인사할 수도 있다. 인생이 시험지라 생각한다면 모두가 다른 답을 써 내려가야 하는 주관식, 서술형 같은 문제라고 할까. 우리는 지금, 답을 적어 내려가기 위해 하루하루 공부하고 그 답을 각자의 연필로 써 내려갈 뿐이다.  




*

끝으로 셰익스피어로 시작된 나의 "비극을 대하는 자세"를 생각해본다. 그때의 내가 비극을 덮었던 몇 가지 이유처럼 여전히 현실감 없이 다가오는 말투, 말도 안 될 것 같은 이야기들이 아직도 있다. 사실 <오이디푸스 왕>도 마찬가지다. <펜트하우스>를 사람들이 그렇게 욕하면서도 보는 것처럼, 왜 이런 말도 안 될 거 같은 비극에 열광하고 아직까지도 회자될까? 인간의 관음 본능, 나는 저렇지 않아라는 안도와, 불행으로 나를 반추하는 심리 그런 것들이 복합된 것은 아닐까 싶다.


 소포 클래스의 비극을  읽어 내려간 지금. 그다음으로 셰익스피어의 비극에 다시 도전하고 싶다. 오이디푸스  하나만으로도 운명, 인생의 아이러니, 승자의 기준  끊임없는 질문들이 머릿속에 남는다. 그렇다면 셰익스피어의 비극이 우리에게 주는 질문을 다시금 찾을  있지 않을까 해서 말이다. 우아한 백조는 아직도 발을 동동 구르지만, 오늘따라 호수는 평화롭고 잔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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