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시절, 갈색의 긴 뽀글 머리에 안경을 쓴 영어 선생님이 있었다. 그 선생님은 늘 우리에게 하는 말이 있었다.
"영어는 '관계대명사'가 정말 중요하다!"
무척이나 복잡한 관계로 이뤄져 있을 것 같은 노골적인 이름. 주격, 소유격, 목적격 파면 팔수록 더 어려워진다. that, which, who, whom 비슷하게 생긴 이들이 왜 다르게 쓰이는지
40명이 넘는 우리 반은 그 관계대명사와 씨름하고 있었다.
선생님은 충분히 외웠다고 생각하면 나와서 테스트를 하라고 했다. 통과해야만 한다는 압박감으로 내가 뭘 외우는지도 모르지만, 뭔가를 외웠다. 내 차례가 오는 동안 비교적 앞 줄에 서 있던 친구들의 희비가 엇갈린다.
테스트는 살벌했다.
문제를 내고, 2초 이상의 정적이 흐르면 아웃이다. 끝이 빨갛고 뾰족한 막대기를 흔들며 "다음!"을 외치셨다. 통과한 친구들은 세상을 얻은 듯 안도했다. 나는 그때 한 번만에 통과하지 않았다. 몇 번만에 통과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테스트를 교무실에서도 했던 기억이 있으니, 막차를 탔을 것이다.
그때 나는, 영어가 너무도 싫었다.
영어는 암기과목이라고 말한다. 모국어가 아닌 말을 공부하는 것이니, 암기라는 장애물이 있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영어는 암기'라는 공식으로 어찌어찌 여기까지 왔다. 토익, 토플, 오픽 참 많은 영어시험을 경험했다. "다음"이라고 외치는 선생님은 없었지만, 늘 나는 그 줄에 서 있었다.
우리 집에는 3년 넘게 딸아이의 하원을 해주던 이모님이 있었다. 요즘은 내가 재택을 하고, 이모님도 바빠지시면서 예전처럼 일하지는 못하지만 가끔 안부를 묻고 밥도 같이 먹는다. 이모님은 60세를 앞두고 있다. 4년 전 이모님을 봤을 때보다 흰머리도, 주름살도 느셨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모습이 있다. 이모님은 늘 영어공부를 하신다는거.
얼마 전에도 함께 점심을 먹었다. 이모님의 작은 에코가방에는 늘 그렇듯 영어책이 들어있었다.
"요즘도 계속 영어 공부하세요?
진짜 이모님 대단하세요!"
"에이 뭘! 그래도 이거 배우니까
세상이 넓어 보인다니까.
한국에 살아도 주변에 얼마나 영어가 많아.
단어라도 읽을 줄 아니까,
백화점을 가도 더 재밌게 쇼핑한다니까!
재밌게 살려면 영어 해야지!"
나는 여전히 20년 전처럼 영어를 공부해야 하는 줄에 서 있다. 다른 게 있다면 그때는 이해도 안 되고, 이름도 복잡한 '관계대명사'를 위해 서 있었다면,
지금은 Truman Capoter가 쓴 Breakfast at Tiffany's를 직접 읽어보고 싶어서이고,
Emily Dickinson이 진짜 하고 싶은 말이 궁금해서, 영화 속의 대사를 그 느낌 그대로 이해하고 싶어서..
진짜 내가 알고 싶은 세상을 위해서이다.
그동안 영어를 외면하고,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근데 나이가 들 수록, 주변을 둘러볼 수록 언어를 알아야만 누릴 수 있는 것들에 계속 눈이 가고 욕심이 간다.
그동안 접고 살았던 영어책을 다시 펼쳐본다. 또 다른 세계를 온전히 느끼고, 즐기는 그날을 기대하며.
:)
+공부는 끝이 없다는 말... 이제는 받아들여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