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강명 <책 한번 써봅시다>
초등학교 6학년. 우리 학교의 한 아이가 책을 냈다. 작년에 서울에서 이사 온 하얀 얼굴의 큰 키, 동그란 안경을 쓴 아이. 아직도 그 아이의 모습과 목소리가 선명하다. 거침없는 사투리의 향연 속에서 그 아이의 속삭이는 서울말을 동경했다. 졸업을 앞둔 겨울, 그 아이는 책을 읽고 꾸준히 써 온 독후감을 모아 책으로 엮어 출간했다. 그 당시 초등학생이 책을 낸다는 것은 굉장한 일, 아니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역시 서울에서 온 애는 달라'
정작 아이들은 '그런가 보다' 했을지언정, 선생님과 엄마들의 칭찬, 부러움, 비교가 쏟아졌다. 그 뒤 그 아이에 대한 나의 동경은 서울말 그리고 '책을 낸 초등학생 작가'라는 것이 하나 더해졌다. 형형색색의 노트에 빼곡히 적어둔 나의 글들이 한없이 초라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때부터였을까? 책이라는 존재는 한없이 멀어 보였다. 사실 책은 물론,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한 흥미를, 보람을 꽤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 주변에 가까운 사람들이 글을 쓰고, 책을 낸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과거 초등학생. 그때의 나처럼 마음이 콩닥거린다.
"내 인생에 책을 쓰는 순간이 올까?"
얼핏, 내 인생과는 무관할 것 같은 확신에 찬 권유가 책 제목으로 담겨 있다. 장강명 작가 <책 한번 써봅시다>
글쓰기 모임 <인라이팅 클럽>을 만나 의식적으로 브런치를 통해서 글을 쓰기 시작하며, 한껏 움츠러들었던 나에게서 한 발자국 걸어 나왔다. 의문이 생기고, 영감을 받고, 뭐라도 내 뱉고 싶을 때, 그리고 함께 하는 사람들 와의 약속을 위해 하나씩 하나씩 글을 쓰고 있다. 하지만 서둘러 남겨버리는 결론과 툭툭 끊기는 듯한 사유에 흔히 말하는 '글태기'가 찾아올 때 즈음.
어쩌면 내 인생에서는 없을 거라 믿었던 말에, 겁 없이 손 내밀고 읽어본 책이다.
반응하는 글(때로는 배설하는 글)과 기획하는 글은 다르다. 그 차이를 느껴봐야 한다. 에세이 열아홉 편의 글감은 있는데 추가로 써야 하는 한 편의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아 속을 썩이는 경험을 해봐야 한다. 18p
들인 시간이 길고 이뤄낸 바의 규모가 클수록 흥분의 강도는 커진다. 몇 달, 길게는 몇 년에 걸친 작업을 마칠 때에는 엄청난 환희와 감격을 느끼게 된다. 30p
책에서는 글을 써야 하는 이유, 정확히 말하자면 책을 써야 하는 이유에 대해 말한다. 한 주제로 200자 원고지 600매를 쓰는 '저자'가 되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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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살 나로 돌아가 본다. 동경이라 포장했지만, 사실은 질투심이 가득했다. 빛이 날 만큼 하얀 피부도 그랬고, 다른 세상에서 온 듯한 저 서울말도 얄밉게도 미웠다. 거기다가 우리 학교에서 글을 제일 잘 쓰는 건 나라고 믿었는데, 그 아이는 책을 냈다. 매일 밤 나도 독후감을 쓰고, 말도 안 되는 소설을 끄적인 노트가 한가득인데 그 아이는 책을 내고, 작가가 되었다. 그렇게 덮어버린 노트의 마지막 장은 질투로 가득 찼다.
이미 세월은 흘렀다. 미련은 늘 세월을 따라다닌다. 어쩌면 정확히 늘 내가 가진 공허함과, 채워도 채워도 끝이 없는 창조에 대한 갈망에 대한 답이 책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 인생에 책을 쓰는 순간을 그려본다. 어떻게든 꼭 한 번은, 뭐든 책을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해진다.
가끔 한번 책이라는 이름 안에 굳어져버린 저 활자들을 책임져야 하고, 그 비난을 감수해야 한다는 생각에 스멀스멀 올라왔던 욕망을 애써 억눌렀던 적이 있다. 바보 같이.
책을 읽기 전, 내내 자신에게 물었던 저 질문에 답이 보인다.
+ 놀랍게도 조지 오웰도, 마크 트웨인도, 박경리 선생님도, 이문열 선생님도 모두 필명을 사용한 작가들이다.
언젠가 내가 책을 쓴다면 '율리'라는 필명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만년필에 새겨진 나의 결심과 함께 언젠가 내 책이, 내 사유가 세상에서 때로는 비난받고, 때로는 깊은 토론의 소재가 되길 바라며..
+ 책에 대해.
책에서는 우리가 책을 써야 하는 이유는 물론, 영감 받는 방법, 에세이/소설/논픽션/칼럼 등을 쓰는 방법이 잘 설명되어 있다. 틀에 박힌 작법서라기보다 책에 대한 인식을 바꿈을 통해 글을 쉽게 쓰는 방법을 설명해준다. 글을 쓰고 잘 쓰고 싶은 사람, 그리고 채워지지 않는 창조에 목마른 사람이라면, 그 답이 책에 있다는 걸 알게 해주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