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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소, 야채를 손 닿기 쉬운 곳에 두기

오늘의 도구, 바구니

by 율리

나이가 들 수록

‘아.. 그 말이 이 말이었구나!' 번쩍이는 순간들이 많아지고 있다. 가령 고등학교 시절, “너희는 화장 안 해도 가장 예쁜 나이야"라고 말하는 어른들의 말에 콧방귀를 뀌었지만, 요즘 거리에서 화려하게 치장한 중고등학생들을 보면 “화장 안 해도 이쁜 나인데..."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또 요즘 들어 ‘그게 뭐였더라….’ 한참 동안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 순간이 자주 찾아오는데, 그때마다 “내 나이 되면 단어가 생각이 안 난다” 라며 발끈하던 엄마의 모습이 떠오른다.

40대의 문턱에서 만나는 이 많고 많은 뒤늦은 공감의 말 중에 가장 많이 고개를 끄덕이는 건 바로 이 말이다.

"나이 드니까 배부터 살이 쪄.."

살이 쪘다 싶으면 며칠 굶고 밥을 반공기만 줄여도 아랫배가 쏙 들어가고, 청바지의 핏이 살아나던 때가 있었다. 운동을 안 해도, 며칠만 참으면 다시 돌아오던 그런 나를 생생하게 기억한다.


계절이 바뀌면, 자연스럽게 옷장을 정리한다. 한쪽 구석에 줄기차게 입었던 청바지가 눈에 들어온다.

반가운 마음에 숨을 한가득 품고 청바지를 입어봤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다. 얼굴은 핏기가 없고 핼쑥하다. 몸무게는 그대로다. 근데 배와 엉덩이가 점점 커져만 가는 것 같았던 이 느낌적 느낌은, 느낌이 아니었다.


문득, 얼굴 살은 빠져만 가는데 작년에 입었던 옷이 하나도 맞지 않는다며 속상해하던 직장 상사들의 푸념이 불현듯 떠오른다.


‘그 말이 이 말이었구나…’


이미지출처 : 핀터레스트




며칠 전 오랜만에 친정에 갔다. 엄마의 식탁 한편에는 파프리카, 고구마, 오이 등 각종 채소가 담긴 바구니가 자리 잡고 있었다.

"엄마 빵 없어?"

아침 눈 뜨자마자 빵을 찾는 나에게, 엄마는 바구니를 들이 민다.


“너도 이제 빵 좀 줄이고 이런 걸 먹어.

나이 들고 먹는 거 조절 안 하면 배만 나와.

내가 너희 아빠 때문에, 너희들 때문에 스트레스받는다고 자기 전 홀짝홀짝 술 마시고,

바쁘다고 밥 대신에 빵 먹고 떡 먹고,

운동도 안 한 게 제일 후회된다.

이제라도 채소, 야채 가까이에 두고 일부러라도 챙겨 먹어라… 운동도 좀 규칙적으로 하고. 체력이 안 좋으면 성격도 안 좋아진다..”


속사포 같은 엄마의 잔소리가 오랜만이다.

“네네… 알겠어요 알겠어”

마지못해 파프리카를 우걱우걱 씹어댄다. 달달하니 맛이 없지는 않다.



서울로 돌아와 우리 집 식탁 주변을 가만히 둘러본다. 가장 눈이 가는 곳에 매일 밤 홀짝홀짝 마시는 술이 보인다. 냉장고를 열면 제일 먼저 맥주도 보인다. 손만 뻗으면 각종 과자와 빵들이 있다.

엄마가 말한, 엄마가 가장 후회된다고 생각한 것들이 한가득이다.

식탁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술들…(얼마전까지 와인도 2-3병 있었는데 홀짝홀짝 내가 다 먹었구나….)


찬장 어딘가에 깊숙이 박혀 있던 커다란 바구니 꺼냈다. 늘 다용도실과 냉장고 한 구석에 처박혀, 있는지도 모르고 썩어나가던 채소들을 바구니 안으로 불러 모았다. 나도 엄마가 했던 것 처럼 ‘채소바구니’를 만들었다.


공간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의식의 흐름, 운의 흐름이 바뀐다는 말을 믿는다. 나는 인생을, 의식에 대한 변화의 시작을 늘 공간에 대한 변화로 출발하는 편이다. (TV 없는 거실도 그랬고, 방마다 책상을 두는 것도 그랬고.)


우선 가장 눈이 가고 손이 가던 술병들의 자리에 바구니를 올려두었다. 가장 가까운 곳에, 의식할 수 있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보기만 해도 건강해질 것 같은 이 바구니 하나로 몸의 변화. 그 시작점에 서 보기로 결심한 것이다.

오늘 아침, 단호박을 깨끗하게 씻고 끓여 죽을 만들었다. 매일 빵과 커피로 가득했던 시간과 공간에 건강함이 채워진다.


우걱우걱 먹던 빵 대신에 당근과 양파로 수프도 만들어먹는다. 당장 배가 쏙 들어가고, 터질 것 같던 청바지에 여유가 생기지는 않겠지만 바구니에 가득 담긴 채소들만 바라봐도, 마음이 한결 날씬해지는 그런 기분이 든다.


채소, 야채를 가까이에.

나이가 들어도 건강한 신체.

꽤나 근사한 결심이 바구니 안에 든든히 담겨있다.



<매일매일 도구도구>
세상의 모든 만물에는 각자의 서사가 있다고 믿습니다. 내가 선택해, 나를 이루고 있는 크고 작은 도구들이 가진 본연의 역할, 맥락을 생각해봅니다. 그렇게 그 안에서 이뤄지는 저만의 소소한 이야기를 기록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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