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에서 결혼하기 01
2018년 1월. 긴 연애 끝에 프로포즈를 받고, 결혼하기로 했습니다.
사실은 결혼 '하는 걸로' 하기로 했어요.
연말 일본 여행 중, 무려 후지산이 보이는 호숫가에서 동틀 녘 받은 프로포즈는 정말이지 추워서, 일단 알았다 좋다고 하고 료칸에 돌아와 뜨슨 밥 먹고 몸을 녹이니, '방금 뭐였지?' 라는 생각과 함께 그제서야 잘했다는 칭찬을 듣고 싶은 BOO씨의 눈빛이 보였습니다. 그 순간 절로 ‘현실도피란 이럴 때 하는 거구나’ 생각이 드는거에요.
그도 그럴 것이 온라인의 수많은 프로포즈 포스트에는 다들 깜짝 놀라고 있거나, 울고(!) 있거나, 적어도 입에 손하나는 올려놓고 눈물을 글썽 정도는 하고 있던데. 그 정도는 아니라도 “고마워, 행복해!"라는 따듯한 말 한마디를 기대하는 그의 앞에서 제 머리에 가득 찬 생각은 '그럼 내 자유는?'이었어요.
What a plot twist you were.
당신은 얼마나 스토리의 반전이었는지.
물론 저는 신랑 BOO씨를 사랑하고, 저를 견뎌줄 유일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또 그 사람을 견뎌줄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가 저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를 정의하는 것이 제 자신 외에 다른 것이 생기는 것이 달갑지만은 않은 이기적인 마음이 앞섰어요. 그래서 후지산 명물이라는 호토우우동 맛집을 찾아 데리고 간 그에게 제가 겨우 던진 말은 "우리 결혼하는 게 맞는 걸까?" 였어요.
그리고 그 하루 동안 온갖 진상짓을 다 했습니다.
그래도 그는 “그래, 나는 지난 6개월간 너랑 결혼하는 게 맞는 건지 고민할 시간이 있었지만, 너는 오늘 3초 만에 대답해야 했으니 당황스럽겠다. 우리 여행하는 동안 천천히 생각해보자."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래서 결혼은 일단 하는 걸로 하고, 좀 더 쉬운 어떤 결혼을 할 것인가를 고민해 보기로 했어요.
도쿄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저희는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결혼 얘기만 빼고 오만가지 얘기를 다 했어요. 지난주 회사에서 열 받은 얘기, 료칸 음식이 맛있었던 얘기, 여름에 오면 후지산을 등산하자는 얘기까지. 결국은 도쿄를 30분 남긴 채 진상짓하던 제가 입을 열었죠.
어떤 결혼식을 하던, 우리는 데스티네이션 해야 할 것 같아.
응, 나도 같은 생각이야
아직 결혼에 대해 명확하게 결론 내지 못한 커플 치고는 결혼식에 대한 생각은 같았는데, 사실은 놀랍지는 않았어요. 그도 그럴 것이 저희는 사내커플에 국제커플입니다. 신랑 BOO씨는 싱가포르 사람, 저는 어렸을 때부터 해외에서 산 한국사람. 일하다 만나서 5년을 연애했는데, 그동안 둘 모두 회사에 있는 팀이란 팀은 다 돌아다녔다 보니 거의 사내 대표 커플 수준이죠.
이런 상황이니 싱가포르에서 하면 회사 행사가 될 것이요, 한국에서 하면 제 쪽에 부를 친지들이 마땅치 않은데 BOO씨는 직계 가족만 50명이 넘습니다. 그럼 제 모국에서 데스티네이션 웨딩을 하는 것 같은 상황이 될 것 같았어요. 뭐, 한편으론 그것도 좋다고 생각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싱가포르에서 한번 더 하자는 말이 나올 것 같았거든요. 또 좀 더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싱가포르도, 한국도 아닌 중립적인 공간에서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디가 좋을까?
태국은 어때? 밥은 무조건 맛있겠다! 근데 더워...
말레이시아는? 좋은곳은 접근성이 떨어져..
싱가포르 주변 섬은? ...배 타고 가자고?
베트남은? 요즘 다낭 좋다던데! 밥도 괜찮을 거고!
발리는? 너무 흔하지 않나?
이렇게 즐거운 생각을 하면서 드라이브를 하다 보니 도쿄에 도착했습니다. 나카메구로의 정말 오래된 에어비앤비에서 머물게 되었었는데, 욕조에 물을 받으려면 가스화로를 틀어야 하는 곳이었어요. 저는 이런 전통적인 불편함을 좋아하는 편인데, 싱가포르는 모든 것이 현대식이고 오래된 것들이 흔치 않아 BOO씨는 불편해 하는 편입니다. 짐을 풀고, 따듯한 차를 내려 식탁에 둘러앉아 생각을 정리 해 봤어요.
저희는,
둘 다 사람을 좋아하지만 혼자 있는걸 더 좋아하고,
저는 도 아니면 모 인 성격인데 BOO씨는 둥글 온화한 성격입니다.
제가 해외에 옮겨 다니며 살았다 보니 BOO씨가 제 친구들, 친지들과 친해질 기회가 없었고,
BOO씨의 가족은 일가친척들이 모여서 일 년에 한 번 여행을 갈 정도로 돈독합니다.
저는 친가 외가 모두 합쳐 제가 개혼일 예정이었고, BOO씨는 6년 전 결혼한 누나가 있어요.
이런 것들을 모아 놓고 생각했을 때 저희가 내린 결론은
1) 데스티네이션 웨딩일 것.
2)80명 이내의 친밀한 결혼식일 것.
3) 준비 비용은 우리가 해결할 것.
4) 오시는 분들과 최대한 시간을 많이 보낼 것.
5)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을 해드릴 것.
이렇게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그저 잡담>>
싱가포르에는 Will you BTO me? (나와 BTO해 줄래?) 라는 말이 있습니다. BTO는 Build to Order의 약자로 일종의 주택분양 시스템이에요. 이 합리적인 싱가포르의 시스템 덕택에 불거 나온, 로맨스라곤 단 일도 없는 이 문장은, 웬만큼 사이가 깊어진 연인들이 싱가포르 주택 산업부에 집을 신청하기 전 "Will you marry me?" (나와 결혼해줄래?)를 대체하여 사용되곤 합니다.
싱가포르는 결혼하지 않은 연인들도 의향만 있다면 정부가 공급하는 주택을 미리 청약할 수 있는데, 선 분양제라 당첨 후 완공까지 3년 정도가 소요됩니다. 대부분의 커플들은 이 기간 동안 결혼 준비를 한 후, 입주기간에 맞춰 결혼식을 올리곤 합니다 (결혼 증명서가 있어야 집 수령이 가능하기 때문에).
문화의 차이일 수 있겠지만, 저는 절대로 이렇겐 할 수 없다고 우겼습니다. 아직도 제 생각엔, 결혼하려면 일단, 프로포즈부터 아닐까요?
2019년 6월.
발리에서 결혼했습니다
준비하면서 느꼈던 바들, 또 알아본 정보들을 천천히 털어놓을 예정입니다.
<<발리에서 결혼하기>>
05 - 누구를 초대할까에 대한 짧은 고민
06 - 발리 결혼 체크리스트
07 - 언제 결혼할까에 대해서
08 - 발리 결혼식의 복병들
09 - 결혼식 일정 짜기
10 - 결혼식날 웃으면 안 돼?
12 - 다음날 아침에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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