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휴가로 제주에 다녀왔다. 제주에 사는 지인과 또 다른 지역에 사는 벗과 함께한 여성 3인의 여행이었다. 5년여쯤, 언젠가 유럽을 함께 다녀오자며 3년 정도 함께 돈을 모았다. 하지만 이러저런 사정으로 시간을 낼 수 없어 함께 모은 돈은 약간의 이자와 함께 각자에게 똑같이 배분되었다. 함께 여행을 갈 수 없었던 이유 중 하나는 똘이의 쇠약해짐이 큰 몫을 차지했었다. 똘이의 등이 굽고 눈이 안 보이는 등 확연한 노화의 징후를 보이기 시작한 이후로는 멀리 어디를 다녀올 생각을 결코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올해 8월 말경에 시간이 났다며 일단 제주를 다녀오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한 벗이 하였고, 나는 처음엔 수업 일정 때문에 망설이다가 갑자기 일정이 바뀌는 덕택에 시간을 낼 수 있었다. 정확히는, 수업 일정이 없어져서 휴가를 잡았는데, 휴가를 잡은 직후 다시 생겼다. 하지만 나는 휴가를 고수했다.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좋은 추억을 만드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죽음에 이를 때는 돈보다는 사랑한 기억, 사람들과 행복하게 웃었던 기억, 마음이 충만하게 채워지는 기억만이 남을 것이다. 책임을 다하되 현재를 향유하는 것. 날마다 죽음을 생각하며, 그 모토를 떠올린다. "누릴 수 있을 때 누리세요"라는 주치의 선생님의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인생은 누리라고 있는 것. 그것은 꼭 여행을 떠나고 맛집을 가고 파티 같은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을 대하는 태도를 의미하는 것이리라. 내가 오늘 당면한 환경을 최대한 누리는 것. 수업에서 만나는 학생들과의 시간을 즐기고, 일상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처리하는 상황들을 누리고, 오늘도 하루 더 나이들어감에 따라 지혜를 얻는 것에 감사하고, 이렇게 여행 기회가 왔을 때 그 기회를 붙드는 것.
제주의 지인 덕분에 우리는 관광객이었을 땐 잘 알지 못했던, 현지인들만 아는 맛집이나 카페, 멋진 풍광이 있는 곳들을 구석구석 탐험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셋 다 책을 좋아하고 책과 관련된 일을 오랫동안 해왔던 사람들이라 문화적 취향이 비슷하여 즐거웠다. 취향과 나이가 비슷하면 공유하는 것이 많기 때문에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몇 가지 인상적이었던 건 새벽 5시에 일어나 한라산을 오른 것. 물론 한라산의 3분의 2정도 지점까지 차를 타고 올라가 1시간가량을 걷는 저강도의 등산이었지만 푸르른 하늘의 화창한 날, 이른 아침이라 별로 무덥지 않은 가운데 눈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은 가슴을 시원하게 트이게 했다. 엄마와 영상통화를 하며 영실기암의 절경을 보여드리기도 하고, 멋진 하늘과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봉을 이용해 셋이 함께 사진을 찍기도 했다. 함께 기뻐하는 것은 혼자 기뻐하는 것보다 그 기쁨이 배는 더했다.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그날의 수영이었다. 바다가 보이는 좋은 위치이지만 다른 호텔에 비해 상대적으로 낡아 합리적인 가격으로 숙소를 잡을 수 있었던 호텔의 야외수영장은, 오후 6시까지만 운영되었고 사람이 별로 많지 않았다. 구명조끼를 입고, 지인이 우리 모두를 위해 한 세트씩 준비해둔 방수책을 들고 들어가 우리는 물위에 둥둥 떠서 책을 보았다. 방수책은 스킨스쿠버를 할 때 사용되는 지도의 재질로 만든 책이라 한다. 물에 담가도 전혀 젖지 않았고, 활자가 번지지도 않았으며, 구겨지지도 않았다. 머리 위에 드넓게 펼쳐진 하늘 아래서, 물 위에 다리를 쭉 뻗고 둥둥 떠다니며 책을 읽는 유유자적의 경험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다음번에 이런 똑같은 경험을 한다 하더라도 이 '처음' 경험만은 못하리라. 서로 마주 보며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리고, 각자의 다리를 모아 V자를 만든 채 함께 책을 읽으며 찍은 사진도 그날의 특별한 추억으로 간직될 것이다.
그런 즐거운 여행 가운데 우리를 사로잡는 또 한 가지는 이제 우리에게 쌓인 세월만큼이나 축적된 삶의 애환이다. 탄력을 잃어가는 피부에 대한 대책에서부터 각자 앓고 있는 만성질환, 우리 피부 속까지 스며들어 있는 가족 이야기와 최근에 본 영화, 우리 삶을 둘러싼 정치, 각자 살고 있는 지역적 특성 그리고 걱정 90% 기대 10% 정도의 미래에 대한 준비에 이르기까지 대화는 우리 삶의 반경 안에서 광범위하게 오갔다. 그 가운데서 내 안에 있던 한 가지 갈망이 어느 정도 해소되게 해준 이야기가 있었다. 바로 제주에 사는 지인의 제주살이 이야기였다. 나는 이제 막연히 오래 살리라 예상할 수 없는 몸이 되었기 때문에 한정된 시간 속에서 내게 최적의 삶과 환경은 무엇일까 고민 중에 있었다. 지인은 젊은 시절 제주가 너무 좋아 자주 여행을 하러 왔다가 남편이 더 제주를 좋아하게 되어 수년 전 제주에 정착하게 되었다. 하지만 막상 살아보니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저자극'이었다. 나는 이렇게 아름다운 풍광 자체가 고자극 아니냐, 이거면 된 것 아닌가, 제주의 푸른 바다와 산과 하늘을 보며 외쳐댔다. 하지만 지인은 밤이 되면 온가족이 운동하러 초등학교 운동장 가는 것조차 무섭다, 사람이 정말 없고 캄캄하다, 어떤 날은 낮에도 사람이 거의 없다는 얘기를 했다. 도심에서는 상당히 떨어져 있는 곳인데 그래서 더 아름다운 곳이었다. 나는 미학적 요소만 고려하여, 차로 10분이면 바다도 산도 갈 수 있는, 절경을 눈앞에 둔 지인의 터전을 경탄하며 부러워마지 않았는데, 그곳을 생활터와 일터로 잡은 사람에게는 또 다른 관점이 있었다. 이렇게나 아름다운 자연환경에서, 사업도 잘 운영되고 있었고, 가족 모두 잘 지내고 있고, 공연이나 문화 감상에도 적극적이고, 근처의 아름다운 카페에 가서 책도 읽고, 맘만 먹으면 한라산도 갈 수 있고, 저녁에 10분만 차 타고 나오면 일몰을 바닷가에서 감상할 수 있는데 그곳에서 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그만의 애환이 있었던 것이다. 어느 밤, 간간이 조깅을 하는 사람들만 있는 고즈넉한 밤바다를 보면서 나는 지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요. 정말 아름다운 풍경인데....바다만 바라보고 있으니 맘이 좀 가라앉네요...." "바로 그거예요! 지금 이 정도는 사람이 아주 많은 거예요. 다른 때는 사람이 아예 없어요. '생의 소리'가 없는 거죠."
사람이 아예 없는, 조명도 밝지 않은, 자연만 있는 곳.... 나는 경험해보지 않아 어떤 느낌일지 상상해보지 않았지만 매일 이런 적막 가운데 있다면 마음이 좀 가라앉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더구나 이주민이라 자신의 관계망이 도시에 모두 남겨져 있다면 아무리 가족과 함께 있어도,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었어도, 채워지지 않는 외로움은 어느 정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진 않겠지만, 아름다운 풍경만큼이나 친밀한 관계망과 적당한 놀거리, 어느 정도 북적이는 사람냄새가 있는 환경이 내겐 적당히 균형 잡힌 환경임을 깨닫게 되었다.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곳에서 누리고 있는 것은 잘 떠올리지 못했다. 한편, 제주에 있는 지인은 나의 이야기를 통해 내가 도시에서는 누리지 못했던 것들을 마음껏 누리고 있음을 새삼 깨달았을 것이다.
여행에서 돌아와 첫 출근을 한 어제. 나는 저녁 수업의 밤퇴근을 그토록 싫어했었는데, 밤에 사람들로 북적이는 버스정류장에서 함께 버스를 타면서, 내 곁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 '생의 소리'가 가득하여 적막에 휩싸여 돌아오지 않아도 되는 것에 감사하게 됐다. 정말....엄청난 관점의 변화였다....약간의 시각만 바꾸면 불행의 요소가 행복의 요소가 되는구나! 여행 덕에 갖게 된 흡족한 마음으로 평화롭게 잠자리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