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킷 리스트가 있어야 할까요?

by arete

며칠이 흘렀다. 우연히 통화를 하게 되어 선생님 두 분과 만나게 되었다. 한 분은 내가 들은 강의를 통해, 한 분은 어떤 사회적 사건에 대해 메일로 문의를 하다 만나게 된 선생님들이었다.


처음 가보는 음식점이었다. 지하철역에 내려서 마을버스를 타고, 마을버스에서 내려서도 좀 걸어야 하는 곳이었다. 하필 지하철역에서 내리자마자 휴대폰 배터리가 방전되었다. 몇 번 출구에서 몇 번 마을버스를 타야 하는지까지만 기억나고 어느 역에서 내려야 할지, 거기서 어느 방향으로 걸어야 할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기억나지 않는 것인지, 미리 제대로 보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얼마 남지 않았던 휴대폰 배터리를 아끼기 위해 자세히 보지 않은 것인지....나도 나를 모르겠다.


하지만 용감하게 마을버스를 타버렸다. 어디서 내리는지도 모른 채. 앞좌석에 앉은 젊은 여성분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음식점 이름을 대며. 그런데 이미 그 음식점을 알고 계신 분이어서 금세 친절하게 알려준다. 마을버스에서 두 정거장 만에 내렸다. 일찍 묻지 않았으면 한참을 더 갈 뻔했다. 하지만 내려서도 생각보다 더 걸어야 했다. 또 다른 한 여성분께 길을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휴대폰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시대인데 말이다. 폭염 가운데에도 여성분은 가던 길을 멈추고 앱 지도를 꺼내어 상세하게 알려주었다. 대부분의 사사로운 일들은 휴대폰이 해결해주기에 거리에서 낯선 이의 질문을 받을 일이 좀처럼 없는 시절에도, 멈칫하지 않고 친절을 베풀어준 이 여성분들께 고마움을 느꼈다.


드디어 당도한 음식점. A선생님이 먼저 와 계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 B선생님도 도착하셨다. 그동안 쌓인 일상 이야기를 나누다 내가 물었다.

"꼭... 버킷 리스트가 있어야 할까요...?"

B선생님이 되물으셨다. "뭘 하고 싶은데요?" 오랫동안 알아온 바, B선생님은 추상적인 것을 곧바로 알아들으시고 그것을 구체화하는 작업에 들어가신다.

"핀란드?"(내가 예전에 아이슬란드에 가보고 싶다고 말한 것을 선생님은 핀란드라고 기억하셨다.)

"아니오, 아이슬란드요."

"왜? 오로라 때문에?"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에서 보고요."

"그런 자본주의적 영화에서 생겨난 욕망은 제외해요. 오로라 보고 싶은 거잖아요. 이제 기후변화 때문에 강원도에서도 오로라 볼 수 있을 거래요. 그때 강원도 가면 될 거예요. 이런 식으로 자본주의적 욕망에서 나온 것들은 제외시키고, 굳이 할 필요 없는 것들도 제외시키고 하다보면 몇 개 안 남을 거예요. 그걸 하세요."


지금 귀찮아서, 부담스러워서, 미루고 싶어서 하지 않은 걸, 죽을 때 후회하지 않을까 두려웠다. 그래서 억지로라도 버킷 리스트를 만들고 행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그분들이 일관되게 말씀하신 것은 '좋은 일상'이었다. '좋은 일상'....이건 주치의 선생님도 누누이 말씀하신 것이었다. 연금 이야기를 꺼냈을 때도 "일상을 사세요, 일상을..."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유방외과 대기실에서 읽은 한 의사선생님에 관한 기사도 비슷한 내용이었다. 오랫동안 유방외과 전문의로 계셨던 분이 대장암에 걸리셨는데, 후임자를 세워두고도 돌아가실 때까지 진료를 멈추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존경스러웠다. 죽을 날을 앞두고도 환자들을 위한 진료, 그리고 자신을 위한 일상을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요즘 오전에 수업 다녀와서 도서관에 가 책을 읽고 글을 쓴 후 운동하고 귀가 후 기도하고 잔다고 하니 일상을 가장 찬란하게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A선생님은 칭찬해마지 않으셨다. 어쩌면 일상에서 탈출하는 대단한 버킷 리스트는 그닥 필요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앞으로 몇 년 정도를 더 살 수 있다는 선언은 삶에는 분명 한계가 있고, 끝이 있다는 것을 매순간 직시할 것을 요구한다. 그때 가장 고민하게 되는 것은,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덜 후회하고 더 충만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충만한 삶은 모두가 바라는 삶이다. 하지만 충만은 내 몸뚱아리 하나를 위하는 쾌락 추구와는 다른 성격의 것일 것이다. 충만은 잘 산 하루의 일상과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잘 산 하루의 일상이란 어떤 것일까?


월,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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