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 제일 황홀한 때

by arete

"암 맞구요. 전이된 암 맞아요."

그래도 혹시나 하는 실낱 같은 희망은 의사샘의 한마디로 공중으로 흩어져버렸다. 펫씨티에서 암일 가능성으로 나왔다 하더라도 조직검사 결과는 다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역시나 아니었다. 조직검사에서 암으로 진단받으면 그것은 100% 암인 것이다.


"문제는 너무 조금 채취되어서 암 성질은 파악할 수 없었다는 거예요. 이런 경우엔 원발암 성질과 동일한 것으로 생각하고 치료에 들어가요."


허탈했다. 2박 3일 입원에 드릴로 살을 파고들어 뼈와 충돌시키기까지 했는데 암 성질은 알 수 없었다니. 암이라는 사실은 펫씨티만 찍어도 알 수 있는 것 아니었나. 그러나 내 뇌는 또 희망회로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렇담 암덩어리가 너무 적어서 채취도 조금 된 걸로 볼 수 있나요?"


원래도 조용하고 차분한 여자 의사샘은 가만히 계시다가 "음....뭐, 그렇게 볼 수도 있겠죠. 근데 그만큼 영상의학과에서 정확히 조준했다고 볼 수도 있고요."라고 침착하게 말씀하셨다.


조금 채취해서 암 성질도 파악 못했는데 정확히 조준했다니? 그 와중에, 아주 작은 병변(암)인데도 정확히 찔렀다는 면에서, 깨알 같은 병원에 대한 자랑인 것인가? 이렇든 저렇든 암 성질을 파악 못한 것은 아쉽지만 매우 조금이라는 면에서 아주 초기 단계일 수도 있다는 희망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후로 계속되는 진료 가운데 선생님은 계속 강조했다. "뼈전이는 크기가 중요하지 않아요." 그 뒷얘기는 없었다. 왜? 왜 크기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지? 병원은 자세히 얘기해주지 않기 때문에 궁금한 것은 환자 몫이다. 알아서 찾아봐야 한다.


치료 방향이 결정되었다. 임상으로 경구용 항암제 두 알을 매일 먹고, 주사를 매달 두 대 맞는 것이다. 진료는 매달 한 번, 영상검진은 두 달에 한 번씩 진행된다. 그렇게 2024년 11월부터 나의 잦은 병원 행군은 다시 시작되었다. 병원이 집과 직장에서 가깝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랄까(실제로 이건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하는 위안이다).


2019년 독성 항암을 했을 때와 달리 이번엔 머리카락도 빠지지 않고 부작용도 심하지 않았다. 2020년 수술 후 계속해서 먹은 항암제보다도 부작용이 강력하지 않았다. 지금의 약이 나에게 미치는 가장 큰 부작용은 호중구가 낮아지고 저녁이 되면 떡실신 지경에 이르는 전신 피로감. 암에 걸리기 전까지 나는 체력을 자랑할 정도로 건강하고 몸 때문에 무엇을 못하는 적이 없었다. 이곳 저곳 다니는 것을 좋아해서 늘 돌아다니고 걸어다니고 여행도 자주 다녔다. 그러나 독성 항암으로 한번 체력이 꺾였다. 항암 이후로는 다시 체력이 서서히 올라와 어느 정도 괜찮아지긴 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잘하면(이건 정말 잘될 경우이다) 평생 먹을 수도 있는 이 경구용 항암제의 부작용이 면역력을 담당하는 호중구를 감소시키고 그에 따라 전신 피로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니, 나는 공주처럼 몸을 아껴야 한다. 절대 무리하지 말고, 자주 쉬어주어야 하고, 일찍 자고 단백질을 풍성하게 잘 먹어주어야 한다. 감염에 주의해야 해서 폭염에도 마스크를 끼고 다니고 날것(내가 좋아하는 회나 초밥 포함!)은 먹으면 안 된다.


언젠가 휴약기가 가까워올 무렵에(3주간 먹고 1주간 쉬는 약이다) 저녁에 기절할 만큼 피로감을 느껴, 나보다 먼저 이 병에 걸리고 처음부터 4기셨던 선배 환우분께 연락을 드렸더니 "지금이 제일 황홀한 때인 아~"라는 답이 돌아왔다. 선배도 처음 먹기 시작한 약의 부작용 때문에 힘들어하면서 의사샘께 "이거 언제까지 먹어야 되나요?" 했다가 비웃음을 당했다는 것이다. "이 약을 평생 먹을 수 있는 게 가장 좋은 케이스인 거예요."라는 답과 함께. 하지만 선배는 이후 약에 내성이 생겨 다른 약을 처방받았고, 그 부작용은 이전 약보다 훨씬 강력한 것이었다.


4기 환자의 현실은 이런 것이다. 죽을 때까지 경구용 항암제를 먹거나 독성 항암을 해야 하는 현실. 온갖 부작용을 감내하고, 이겨낼 방법을 찾아내야 하는 현실. 4기 환자들이 모여 있는 온라인 카페에 들어가보면 7번째, 8번째, 또는 10번 이상 약을 바꾼 환자들이 수두룩하다. 그리고 그렇게 약을 바꾼 횟수가 많을수록 죽음의 문에 성큼 다가서 있는 것이다. 약을 바꾼다는 건 약에 내성이 생겨 암이 다시 커지거나 또 다른 곳으로 전이됐음을 의미한다. 약을 바꿀 때마다 환자들은 절망을 맛보지만 이내 절망도 사치로 여기고 며칠 만에 마음을 일으켜 그 다음 약에 적응하기 위해 전력을 쏟는다. 그 과정 자체가 생명에 대한 인간의 불굴의 소망과 정신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 지금이 내게 다시 없는 기회인 것이다. 다음 단계로 들어서지 않도록 나를 돌볼 수 있는 천혜의 기회.


그날 이후로 나는 좀더 오래 숙면을 할 방법을 강구하고, 수업이 없는 시간은 누워 있거나 쉬고, 좋은 단백질을 더 많이 먹고, 보조면역치료도 하고, 뒷산에 오르는 등 약의 부작용에 대해 '어쩔 수 없지'라는 체념이 아닌,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적극 알아보고 실천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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