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는 없다?!

by arete

전이 진단 이후 몇 달이 지나자 몸과 마음은 서서히 안정되어갔다. 생존이 달린 문제면 사람은 생각보다 쉽게 적응하는 것 같다. 그리고 똘이에게 약속한 대로 매일 글을 썼다. 그런 가운데 노후에 대해 준비를 할 만한 것이 있을까 점차 생각되기 시작했다. 투자 같은 것을 한번도 해본 적이 없고 고작해야 몇 년부터 시작한 꾸준한 저축밖에 없었던 나는 노후준비를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도 되고 궁금하기도 했다. 주변에 물어볼 만한 사람도 없었다. 저축 외의 다른 방법으로 돈을 적극적으로 굴리는 사람이 내 주변엔 딱히 없었다. 없는 건지 말을 안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프리랜서로 살고 버는 돈도 대단치 않은 나 같은 사람은 누구에게 노후에 대한 자문을 구하나 머릿속에 염두를 두고 있던 터였다.


염두에 두고 있으면 길이 보이는 것일까. 서울시청에서 메일로 오는 정기 뉴스레터에 '리테크'에 대해 시민기자가 쓴 글을 우연히 발견했다. 4050 중년에게 자산관리법을 무료로 상담해준다는 내용이었다. 밑져야 본전이겠다 싶어 신청방법을 알아본 후 온라인으로 신청했다. 생각보다 빨리 연락이 왔다. 내게 배정된 상담사에게서 안내문자가 왔고 1차는 30분 전화 상담, 2차는 1시간 대면 상담으로 진행된다고 했다.


상담사가 보내준 양식으로 나의 재정상황이 담긴 내용을 보냈다. 1차 전화 상담을 진행한 후, 무료로 이렇게 양질의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니 놀람을 금치 못했다. 잘만 찾아보면 이토록 좋은 정책들이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앞날의 재정에 대해 막막했던 내가 좋은 상담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을, 며칠 후 만난 대학 선배님이자 예전 회사 상사에게 전했다. 선배님은 그 상담사의 이름이 무엇인지 물었고, 대답을 하자 "아~ 내가 아는 사람이야~"라고 말씀하셨다. "!!!" 알고 보니 상담사는 나의 대학 선배이자 같은 동아리의 몇 년 선배셨다. 하지만 내가 만난 적은 없는 선배님. 세상에나, 이런 우연이. 2차 대면 상담에서 상담사님께 확인을 해보니 역시나 놀라워하시며 "이렇게 세상이 좁으니 착하게 살아야 해요" 하며 환한 미소로 웃으셨다. 리테크는 올해 시작된 제도인 데다 10명의 상담사 중 랜덤으로 배정이 되는데, 나의 대학 동아리 선배님이 상담사가 되어주신 것이다.


재정상담을 하다가 선배님은 내게 물으셨다. "몇 살까지 살 것 같아요?" 본인이 생각하는 기대수명을 산정해서 그것으로 노후대비할 방책을 세우려는 의도로 물으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 질문에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게....난 몇 살까지 살게 될까....지금 이렇게 멀쩡한 것으로 봐서 그래도 나는 최소 이 정도는 살 수 있겠다 싶었다. "80세....정도요...." 상담사님은 내 대답을 들으시더니 "그렇게 짧게 잡아요?" 하고 반문하셨다. 나는 자신없게 "그것도 못 살지도 몰라요...."라고 답했다. 나는 일단, 앞으로 몇 년간 돈을 붓고 십수년간 조금씩 연금을 받는 개인연금 상품을 들었다.


상담도 받고 좋은 선배님도 알게 되고, 선배님이 추천해주신 개인연금도 들게 되어 마음이 가볍고 뿌듯해졌다. 빠듯하지만 이렇게 저렇게 구성하면 그렇게 팍팍하기만 한 노후는 아니겠다 싶었다.

그런데...한 생각이 똬리를 틀었다. 내가....정말로 이만큼은 살 수 있을까...? 계획을 세울 수 있는 미래란 것이 나에게 있을까...?


이걸 누구에게 물어봐야 하나. 아무도 모르는 일을. 내게 남은 기간이 얼마나 될지 누가 정확히 알까. 보통의 건강한 사람들이라면 지병도 사고도 일단은 생각지 않아도 되니 90-100세 정도를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며칠 후 진료 시간에 담당의사샘께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선생님, 제가 지금 상태에서 개인연금을 들어도 되는지 판단하기 위해 여쭤보는 건데요....저 같은 케이스의 환자가 20년 산 경우도 있나요?" 조용한 선생님은 잠시 말을 멈추시더니 이어나가셨다. "없어요." 평소 따뜻하고 온화한 인상의 선생님은 이 순간만큼은 조용하게 단호했다. "5년도 절반, 10년은 20%." 뭔가...확인사살당한 것 같아 머리가 차가워졌다. 한번 더 묻고 싶었다. "저 같은 소수전이암의 경우도요?" 소수전이암이란 전이된 암이 1-2군데 정도인 경우를 뜻한다. 선생님은 군더더기 없이 답변하셨다. "네." 답을 듣자 나는 마음에도 없는 미소를 지으며 "그렇군요. 그냥 연금 같은 건 생각하지 말고 지금이나 잘 살아야겠네요" 하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안쓰럽다고 생각하신 건지, 일어나는 내게 "그냥 일상을 사세요, 일상을" 하고 선생님은 덧붙이셨다. "네. 여행도 좀 다니면서 일상을 살아야겠네요" 했더니 그러라고 하셨다.


마음 따뜻한 나의 담당 간호사는(나는 임상 중이어서 담당 간호사님이 따로 계시다) 진료실을 나오는 나의 등에 손을 대며 "괜찮으세요?" 하고 애처롭다는 듯 안타까운 눈빛을 보냈다. 괜찮지는 않지만 어쩌겠는가. 의사가 그렇다니 그런 줄 알아야지. 당장 소화는 안 되지만 일단은 받아들여야지. "네~" 하고 나와 약을 받고 주사를 맞고 병원 일과를 모두 마쳤다.


5~10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다. 다른 암 4기라면 기대여명이 1년도 채 주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르니까. 4기 암 환자치곤 긴 시간이었다. 하지만 다른 암 4기 환자와의 비교 없이 나 하나의 인생을 생각한다면 예상보다 훨씬 앞당겨진 기대수명이 아닐 수 없다.


유방암 4기 환자들의 기대여명 통계를 어딘가에서 들어본 적이 있기 때문에 새삼스러운 정보는 아니었지만, 이 통계가 나에게도 적용이 된다는 이야기를 담당의에게서 직접 확정하여 듣는 건 지금까지 가져보지 못한 새로운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5년 이상 살 확률 절반, 10년 살 확률은 20%. 이런 정보는 어찌나 금세 뇌에 확고히 저장되는지. 나는 그 길로 선배님이신 재무상담사님께 전화를 걸어 개인연금을 해지하겠다고 했다. 선배님은 일단 받아들이시고 다른 방책을 고민해보겠다고 하셨다.


과거--현재--미래. 삶은 이렇게 구성되는 줄 알았다. 암 이전의 삶은 과거를 반추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데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머릿속은 과거 아니면 미래로 꽉 들어차 있었다. 암 치료 중의 삶은 철저히 현재만 있는 삶이었다. 그래도 자주, 앞으로 어떤 인생을 살지 미래를 꿈꿨다. 그런데 전이 이후의 삶은 긴 미래를 꿈꿀 수도 꿈꿀 필요도 없는 삶이 되었다. 이제 과거, 현재, 미래를 내 뇌 속에 각각 몇 프로로 심어놓아야 하나? 과거-현재-미래가 분리되는 것이 아닌 연속선 상에 있는 것이며 현재 없이는 미래도 없다는 걸, 이렇게 생생하게 체험하게 될 줄이야! 실은 미래라는 실체는 존재하지 않고 '현재-현재-현재....'가 이어지는 그런 것 아니었을까?


이제 내 머릿속의 99프로는 오직 현재로 채워놓아야 하는 현실을 맞게 되었다.

월,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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