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 향유하기

by arete

햇살은 쨍쨍하지만 하늘만큼은 선명한 푸르름이던 어느 날, 자주 가던 코스로 서촌을 돌았다. 단골 액세서리 가게에도 가고, 작은 독립서점들도 둘러보았다. 그러다 수성동 계곡에 앉았다. 그날은 비가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계곡에 물이 꽤 차 있었다. 자주 계곡물이 말라 바닥을 보였었는데, 그렇게 물이 어느 정도 차올라 계곡다운 모습을 보이니 마음이 흐뭇했다. 더운 날 도심 한복판 계곡만큼 좋은 피서지는 없을 것이다. 작은 계곡이라 인파로 붐비지는 않았지만 적잖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양산을 든다. 손수건을 깔고 앉는다. 샌들 위에 양말을 벗어둔다. 계곡물에 발을 담근다. 책을 무릎에 펼치고 읽어내려간다. 하늘을 바라본다. 몇 분마다 하늘 속 구름의 모양이 바뀌어 있다. 어디선가 애플민트 향이 흘러들어와 코끝을 간지럽힌다. 몇 가닥의 바람이 뺨에 스친다. 중년의 어머니가 장성한 아들의 발을 씻겨주는 소리가 출렁인다. 한 소년이 플라스틱 삽을 들고 계곡물을 퍼서 주르륵 붓는다. 해가 점점 위치를 바꾸더니 다리에 그늘이 진다.


잠시 하던 생각을 멈추자 눈과 코, 귀, 그리고 살갗으로 다채로운 세상의 색깔이 들어왔다. 세상은 결코 단조롭지도, 무채색이지도 않았다. 내가 그것을 그대로 바라보려 주의를 기울였을 때.


똘이를 보내고 나서 가장 후회한 것도 이 지점이었다. 똘이가 노견이 되기 전, 그러니까 내가 암에 걸리기 전, 일로 분주하고 정신없을 때, 하루 중 똘이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누린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같이 산책을 할 때도 상념에 빠질 때가 많았다. 당시 안고 있는 문제들을 생각하며 걱정하거나 미래를 불안해했다. 일에만 골몰하거나 인간관계로 스트레스를 받거나.


책을 읽으며 권태를 달랠 때 바닥에 놓인 책 위에 철퍼덕 엎드려버린 똘이의 사진이 있다. 사진 속의 똘이는 "딴 생각 하지 말고 지금의 나 좀 봐주세요" 하고 있는 듯하다. 지금 내 앞에 놓인 것들을 바라보고 향유하기보다 머릿속에 있는 환상과 나 스스로 문제 삼은 것들에 빠져 걱정이나 불안에 휩싸일 때가 얼마나 많았나. 똘이가 있었는데도 불행했던 시절이 지금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어떻게 똘이가 있었는데 슬프고 우울할 수가 있었을까! 종종종종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걷는 모습. 걷다가 내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는 모습. 똘이를 안고선 배를 쓰다듬어주면 내 뺨이 깎여나갈 정도로 혀로 핥아주던 모습. 똘이의 존재를 누리고 향유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행복할 수 있었는데.... 상실하고 나서야 뼛속 깊이 깨닫게 되는 이런 진실을 상실 전에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 같다.


대신, 나는 지금 내 곁에 있는데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없는가 유심히 살펴본다. 수성동 계곡의 한때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에게 충만함을 주었다. 나의 오감이 열려 있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하루의 루틴을 살아가는 것은 지루하거나 스트레스로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루틴을 상실할 때 맞이하게 될 불안을 생각해보면 또 이 루틴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경험하게 된다. 루틴마저도 평면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입체적으로 보기 위해선 많은 주의가 필요하다. 그 루틴이 얼마나 편안한 것이었는지, 그리고 나를 이루는 중대하며 다채로운 순간들이었는지를 깨닫기로 한다. 모든 순간들. 그리고 내 곁에 있는 존재들. 눈을 뜨고 주의를 기울이고 마음을 열어 잘 관찰하고 발견하고 누려보기. 이제부터 이것이 나의 과제다.

월,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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