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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가는 어휘 학습

영어 잘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4)

영어도 결국은 '암기 과목'이라고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원리고 뭐고 일단 기본적으로 외워야 할 단어들을 절대 무시할 수 없고, 말하기에서도 기본 문장을 많이 외우면 그것만으로도 기본 회화는 어느정도 가능하다는 주장이죠. 전적으로는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자동적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머리 속에 새겨진(암기된) 데이터(단어, 문장 등)가 많을 수록 유리하다는 점에서 어느정도 일리는 있는 말입니다. 영어가 '암기 과목'은 아니지만 '암기'가 어느정도 동반되어야 하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이 '암기'를 어떻게 하느냐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우리 학생들은 종이가 까맣게 되도록 반복해서 해당 단어와 간단한 한글 정의를 쓰는 소위 '깜지'라는 방식으로 단어 암기를 해 왔습니다. 아직도 일선의 몇몇 학교나 학원에서는 이 '깜지'가 학생들에게 의무적인 숙제로 부여되는 등 꽤 선호되는 것으로 압니다. 

종이가 까맣게 되도록 반복해서 쓰고 쓰고 또 써서 외우는 "깜지"

이러한 방식의 암기는 영어 학습의 초기 단계에서는 어느정도 의미가 있습니다. 기초 어휘를 빠른 시간 내에 정확하고 확실하게 암기하는 방법으로는 꽤 효과적이라는 의견이 많지요. 그러나 중장기적인 영어 학습에 있어서는 단점 내지는 한계가 존재합니다. 해당 단어 자체의 '암기'에는 성공적일지 모르나, 그 단어를 실제 언어 활동에 활용하는 데에는 매우 비실용적이라는 평이 많습니다. '단어는 많이 아는데 실제로는 하나도 제대로 써 먹지 못한다'는 영어 학습에 대해 흔히 도는 말이 그 증거죠. 초기 이후의 어휘 학습에서는 좀 더 입체적인 접근이 필요합니다.


단순한 한글 정의에 짝맞추어 암기한 단어들은 여러 경우에서 길을 잃습니다. 보통 소위 '서바이벌' 단계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고 '초급' 후반 혹은 '중급' 입문 단계부터 나타나는 문제들인데, 예를 들어 pretty 를 '예쁜'으로 beautiful 을 '아름다운'으로 달달 외운 학생들이 이 두 단어를 단편적으로만 사용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우리말로 '예쁜'이라고 해 주어야만 pretty 가 생각나고 '아름다운'으로 찝어줘야 beautiful 이 떠오르는 것이죠. 미적으로 훌륭한 대상에 대해 말할 때 두 단어를 능동적으로 떠올리고 사용하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경직성은 pretty 가 very 의 의미로도 쓰이는 것을 추가로 익히는 데에도 방해를 합니다. pretty good 같은 표현을 즉각적으로 소화하지 못하고 약간의 시간이 걸리는 거죠. 또한, He's beautiful. 이란 문장을 낯설어 합니다. 우리말의 '아름다운'을 남자에 대해 잘 쓰지 않다보니 영어에도 이를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죠. 


초급 단계를 벗어나 중급 이상의 수준에 이르기 위해서는 어휘도 급격히 확장되어야 합니다. 단순한 최소 의미 전달 표현을 위한 어휘에서 보다 구체적이고 상황에 적절한 어휘들을 갖추어야 하죠. 그런데 이것이 무조건 단어만 달달 왕창 외우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enough(충분한)의 동의어로 plenty (of), adequate 을 익히고 암기한다고 해 보죠. 이 세 단어를 '깜지'씩으로 달달 외우는 데에는 성공했습니다만, 그것만으로 이 세 단어를 실제 언어 생활에서 '잘' 활용할 수 있을까요?


충분하다고 말하는 것도 문맥에 따라 의미가 조금씩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프로젝트 마감날까지는 '시간이 (매우) 충분해'라고 말하는 경우는 시간이 넉넉하다, 여분이 상당히 있다는 뉘앙스가 있죠? 이럴 때에 plenty (of) 를 써 볼 수 있습니다. We've got plenty of time. 우리의 구어체로 소위 '시간이 널널하다'는 표현과 비슷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반면에 새로 얻는 자취방이 작기는 해도 나 살기엔 '충분하다'고 말할 때에는, 앞서 말한 것과 같은 '넉넉한 여분'까지는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냥 겨우 겨우 부족하거나 아쉽지 않을 정도, 딱 그 정도의 느낌이지요. 바로 이런 경우의 '충분한'은 adequate 이 표현해 줄 수 있습니다. My room is small but adequate. 

중기 이후의 어휘 학습에서는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정확한 의미 혹은 뉘앙스에 맞는 어휘가 바로 이거다!라는 재미가 학습의 가속과 깊이를 더해줍니다. 또한 문법에서처럼 우리는 안절부절하는 사람을 '똥마려운 강아지같다'고 하는데, 영어에서는 '바지에 개미가 들어간 것 같다(have ants in one's pants)'고 말하는 것과 같은 문화/표현방식의 차이도 같은 역할을 하지요.

에베레스트를 오르는 것은 동네 뒷산을 오르는 것보다 많은 장비와 복합적인 전략이 필요하다.

동네 뒷산을 오르는 데에는 그닥 큰 준비도 필요없고 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에베레스트를 오른다면 여러 장비와 복합적인 전략이 필요하고 시간도 오래 걸리겠죠? 여러분의 영어 목표가 동네 뒷산 이상이라면 그만큼 멀리가는 어휘 학습 접근/전략과 함께 하세요. 그러기 위해 지금 내가 선택한 어휘 교재나 수업이 멀리 가는 여러분의 목표에 맞는 접근과 구성을 갖고 있는지부터 잘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위 글의 원문은 2014년 10월 네이버 박상효의 영어카페에 올린 "영어 잘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4) 멀리 가는 어휘 학습"입니다.


원글 보기: http://cafe.naver.com/satcafe/6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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