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디즈에서 마주한 지구의 숨결
유빙
_2025년 8월 7일, 알래스카 발디즈(Valdez)_
새벽 4시 48분.
문을 열고 바다를 바라봤다.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고,
빛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바다는 이미 깨어 있었다.
항구 근처는 고요했고,
건물 외벽은 밤새 내린 비에 젖어 있었다.
그날 아침,
우리는 마을을 천천히 걸었다.
숙소 근처의 벤치를 지나
항구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
항구에 서 있으니
발디즈는 단순한 어촌이 아니었다.
벽에 걸린 오래된 사진들,
낯선 듯 무심한 주민들의 말투—
모든 것이 시간을 품고 있었다.
가이드가 말했다.
> “1964년, 미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지진이
> 이곳을 무너뜨렸어요.
> 이후 도시 전체가 지금의 자리로 6킬로미터 옮겨졌죠.”
그 지점은 지금 ‘Old Valdez’라 불린다.
우리가 걷고 있는 이 길은
과거가 아니라,
**과거를 옮겨온 자리**였다.
---
마을 박물관 입구 벽면엔
1989년 ‘엑슨 발디즈(Exxon Valdez)’
유조선 사고에 대한 짧은 설명문이 붙어 있었다.
> 프린스 윌리엄 사운드 해역, 블라이트 리프에서 좌초.
> 1,080만 갤런의 원유 유출.
> 수십 년 동안 바다는 죽어 있었다.
안쪽 전시관엔
그날의 신문 스크랩과
기름으로 뒤덮인 해변의 사진 몇 장이 남아 있었다.
우리는 조용히 돌아 나와
항구 앞 벤치에 앉았다.
바람이 불었고,
전봇대 꼭대기엔
하얀 머리의 독수리 한 마리가
가만히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날,
**발디즈는 조용했다.**
그 조용함 속에서
이 도시는 오래도록
무언가를 기억하고 있는 듯했다.
---
프리미엄 탐사 일정 — 오후 12시
점심 무렵,
우리는 약 200명만 탈 수 있는
작은 탐사선으로 갈아탔다.
이날은 실버시 항해 중에서도
가장 특별한 날이었다.
**5시간 동안 이어지는 해양 탐사 프로그램.**
1인당 500달러가 추가되는 프리미엄 일정.
모든 기항 체험이 포함된 실버시에서도
이 여정만큼은 예외였다.
이건 단순한 관광이 아니라,
**지구의 심장으로 들어가는 항해**였다.
---
탑승 전부터 공기가 달랐다.
누구도 떠들지 않았고,
모두가 조금 더 단단한 눈빛으로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배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가이드가 말했다.
> “지금 이 시간대가 제일 좋아요.
> 해양동물들이 깨어나는 시간이거든요.”
출항하자마자,
해달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서너 마리가 물 위에 등을 대고 떠 있었고,
그 곁에서 또 다른 무리가 함께 흘러갔다.
> “러시아 통치 시절,
> 해달 가죽은 최고급 옷감이었어요.
> 그래서 너무 많이 잡혔죠.”
이제 그들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작은 발을 허공에 들고 파도를 타며,
서로의 털을 매만지며
조용히 하루를 흘려보내고 있었다.
---
잠시 뒤, 누군가 외쳤다.
> “고래다!”
검은 등줄기가
수면을 뚫고 솟구쳤다.
거대한 꼬리가 천천히 물을 치며 사라졌다.
**흑동고래였다.**
그 고래는 우리 쪽으로 방향을 틀더니
핀을 한 번 들어 올리고,
다시 깊은 물속으로 몸을 말아 넣었다.
우리는 숨을 멈춘 채
그들이 다시 나타나길 기다렸다.
그 장면은 함성이 아니라,
**정적이었다.**
---
그리고 믿기지 않는 광경이 이어졌다.
**바다를 건너는 두 마리의 사슴.**
작은 섬에서
다른 섬으로 건너가던 길이었다.
뿔도 달려 있었고,
물 위로 목만 드러난 채
묵묵히 나아가고 있었다.
그때,
누구도 카메라를 들지 않았다.
모두가, 그냥 바라봤다.
---
항해 후반부,
바다사자 무리가 있는 해안에 닿았다.
바위 위에 빽빽하게 붙어 있었고,
몇 마리는 물로 뛰어들며
굵은 숨을 내뿜었다.
햇살이 물기를 반짝이게 했고,
그 속엔 오래된 생명의 리듬이 살아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우리의 배는 빙하 앞으로 다가갔다.
빙하는 조용했다.
말도, 소리도 없었다.
그러나 그 색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푸름**이었다.
유난히 푸른 얼음 조각 하나가
우리 앞을 천천히 스쳐 지나갔다.
---
**총 5시간의 항해.**
해달, 고래, 사슴, 바다사자,
그리고 푸른 빙하.
누군가에겐 단순한 관광이었겠지만,
오늘의 나는
**지구의 숨결과 마주한 하루**였다.
> 이날을 잊는다면,
> 나는 내 여행을 기억할 수 없을 것이다.
귀여운 바다. 수달
바다사자무리
흑돔고래
흰머리 독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