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리의 끝에서, 여권을 닫다

마지막 시험은 바다가 아니라 공항에 있었다

by 헬로 보이저
길리 T 섬


길리섬에서의
마지막 새벽이 다가오고 있었다.
선라이즈도,
선셋도
끝내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길리는 오래 남을 섬이 될 것 같았다.

패스트 보트

해가 뜨기 전,
나는 숙소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함께 일하던 직원들.
눈이 마주칠 때마다
짧은 인사를 나눴다.
말은 많지 않았지만
그 정도면 충분했다.

아침을 먹고
짐을 챙겨
러기지를 끌고 내려왔다.

항구까지는 약 2킬로미터.
지도에선 짧아 보였지만
짐을 들고 가기엔
꽤 애매한 거리였다.

그때,
며칠 동안 자연스럽게 친해졌던
숙소 직원이 말을 걸었다.
“스쿠터로 데려다 줄게요.”
밤새 비가 내려
길이 젖어 있다며,
짐 들고 가기 힘들 거라고 했다.
그 말이
왜 그렇게 고마웠는지
지금도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다.


여행에는
이유 없이 마음이 풀리는 순간들이
가끔 찾아온다.

그날 아침이
딱 그런 순간이었다.

그렇게
아무 탈 없이
배를 타고
빠당바이에 도착했다.

항구에는
이미 사람들이 가득 서 있었다.
미니밴을 타고
쿠타까지 가면
여러 곳을 들러
다섯 시간은 걸린다고 했다.
그랩앱으로 확인해 보니
요금은 45만 루피아.

그때
어디선가 한 사람이 다가왔다.
“30만 루피아에 바로 가줄게요.”
잠깐의 계산

(27000 원)
망설일 틈은 없었다.


그렇게
쿠타까지
두 시간 만에 도착했다.
조금만 판단이 늦었어도
발리의 지옥을
다시 한번 경험할 뻔했다.

발리에서의
마지막 밤.
나는 잠들기 전
여러 생각을 했다.

다음 날은
싱가포르로 향하는 날이었다.
새벽 네 시.
몸을 일으켜
짐을 다시 확인했다.

다섯 시 반,
식당 문이 열리자
가장 먼저 들어갔다.
아침을 먹고
샌드위치 하나를 싸서
가방에 넣었다.
혹시 모를 하루를 대비해
아주 작은 준비를 했다.


쿠타에서 발리 공항까지는
차로 십 분도 걸리지 않았다.

아침 일곱 시.
에어아시아
탑승 수속을 하려는 순간,
직원이 내 여권을 오래 들여다봤다.
그리고 말했다.
“스탬프 찍을 자리가 없습니다.”
그제야 알았다.
여권에는
‘빈 페이지’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걸.
갱신 날짜만 생각했지,
페이지가 남아 있어야 한다는 건
단 한 번도 떠올리지 못했다.

의자에 앉아
기다리라는 말을 들었을 때,
머릿속이
순식간에 비어버렸다.

어쩜 발리에서
나가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라오스.
앞으로의 일정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렸다.
얼굴이 하얘졌다.

그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건
기도뿐이었다.

잠시 후,
슈퍼바이저가 나타났다.
여권을 다시 보고,
나를 보고,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출국 허가.

그렇게
나는
발리를 떠날 수 있었다.
발리에서 싱가포르까지
비행시간은 세 시간.
미리 준비해 둔
어라이벌 카드 덕분에
입국은 조용히 끝났다.

그리고 그렇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싱가포르에서의 시간이
조용히 시작되었다.

길리는
선라이즈 없이 떠났지만,

발리는
마지막까지
나를 시험했다.

쿠타 숙소

《마하바라타》의 한 장면을 형상화한 동상

마지막으로 보여준 발리에서의 선라이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