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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원 Oct 10. 2020

육아가 힘들지 않은 이유

육아의 밑천 2

시디 케이스 안에 브리트니 스피어스와 토이가 공존했던 그 시절.


등하교 시간.

학교 정문 앞을 가득 채운 자가용들.

버스에서 와르르 쏟아지는 교복 입은 아이들.


고등학교 시절, 내가 살던 곳은 비평준화 지역이었다. 시험 보고 성적대로 들어간 고등학교였기에 걸어서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우연의 일치로 집이 가까웠던 것이고, 대부분은 버스 타고 혹은 부모님 차를 타고 등교했으며 심지어는 한 시간 걸려 등교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스카이캐슬보다는 많이 순박했다고 생각하지만 그 당시 강남 교육열 못지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수능 입시를 위한 학원 강의들도 평범치 않았다. 그때도 유명했지만 지금은 더 유명해진 분들의 수업을 큰 대강당 안에서 최소 백 명은 넘는 작은 머리들이 다닥다닥 붙어 앉아 들었다. 지금처럼 인터넷으로 정보가 넘쳐나는 시절도 아니었기에 엄마들 사이에서 교육 정보를 교류하는 일은 지금보다 훨씬 폭이 좁고 어려웠으리라 생각한다. 그래도 엄마는 항상 정보의 중심에 계셨었다.


절대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시간들.

그 시절, 부모님과의 갈등은 하늘을 찔렀다. 그런 식상한 표현은 쓰고 싶지 않지만 어쨌든 그 정도로밖에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갈등이 심했다. 그렇다고 반항아였다던가, 비행청소년 같은 건 더더욱 아닌, 오히려 모범생에 가까웠지만 부모님을 많이 실망시켰고 아프게 해 드렸던 것 같다. 내 평생 눈물은 그때 대부분 다 쏟았고 엄마도 나처럼 눈물을 쏟았을 거란 건 나중에야 깨달았다.


그렇게 지지고 볶고 롤러코스터를 탔다가, 나는 내 안의 나와 어느 정도 타협을 했던 것 같다. 문제집 한 권을 다 풀면 읽고 싶었던 책을 읽고 나서 맨 뒷면에 책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버리는 식으로 나름 응어리진 것들을 해소했는데 소심했지만 꽤나 만족스러웠던 나만의 작은 반항이었다.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없었고 나의 시간을 내가 쓸 수 없었던 것에 대한 나름의 생존 방안이었다. 그때가 내 인생 통틀어 가장 책을 많이 읽었던 시기가 아닐까 싶다. 한 번은 뒷면에 몰래 쓴 글을 까맣게 잊고 있다가 친구에게 문제집을 빌려줘 놓고 나중에야 알게 되어 뜨악했던 적도 있었다.


어쨌든 난 18살 소녀였고 가끔 허무했지만 또 가끔은 꿈을 꾸는 날도 있었을 것이다. 여느 고3 수험생들이 그렇듯 나 또한 기대 반 두려움 반으로 수능을 준비했고 수능 직전 모의고사 성적은 반에서 5등이었다. 수능날, 엄마는 점심으로 뭐 먹고 싶냐고 물어보셨고 나는 제일 좋아하는 음식인 ‘김밥’을 댔다. 그때까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은 엄마가 새벽같이 일어나 싸주셨던 소풍날의 김밥이었으니까. 하지만 11월 초겨울 수능날, 국물도 없는 김밥이라니! 결국 점심 먹고 배탈과 설사에 시험 도중 화장실을 몇 번이고 들락날락거리다가 울다가 화장실에 앉아있다가 다시 정신 차리고 시험을 마무리했다. 화장실에 있었던 그 시간의 수리영역은 참담했고 나머지 과목으로만 점수를 받았다. 지옥이 따로 없었지만 그래도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나머지 과목을 마친 나 자신이 한편으론 대견했던 생각이 난다.

집에 돌아와서는 이름하여 떡볶이 사건이 일어났지만 말이다.


수능날 배탈이 나서 그야말로 ‘폭망’했다는 어마어마한 이야기를 들은 엄마는 아무렇지 않게 떡볶이를 먹고 있는 나를 보고 떡볶이 그릇을 뒤엎고야 마셨다. 어쩌다 뒤엎어졌는지, 의도적으로 그렇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게 만약 밥그릇이나 반찬거리였다면 너무도 지질해서 견딜 수가 없었을 텐데 다행히도 빨간 떡볶이 국물이었다. 밥상머리에서 분위기가 싸해진 적은 있었어도 떡볶이를 먹다가 난리가 난 적은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떡볶이 국물엔 최소한의 정감 같은 게 남아 있어서 나중엔 심지어 웃으며 하는 이야기가 되었고 나는 여전히 김밥과 떡볶이를 좋아한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다짐했더랬다. 누구를 위해 재수를 하나, 내 인생에 더 이상의 수능은 없다고.

다행히 그 해의 수능은 알고 보니 어렵기로 유명했는데 특히 어려웠던 과목에서 나는 좋은 점수를 받았고 그게 모자란 점수를 메꿔주었다. 원래 기대했던 만큼의 좋은 대학은 아니었지만 그 정도로 망한 것 치고는 그래도 좋은 학교를 갈 수 있었다. 교대를 가라는 부모님 권유를 뿌리치고 점수에 맞는 학교와 과를 골라서 들어갔다. 그리고는 인생 친구들을 만나 즐겁게 대학생활을 했고, 약간은 어수룩하고 부족했던 나를 막 대해준 친구들 덕에 점점 둥글둥글 사람 모습을 갖춰갔던 것 같다.


그렇게 지금까지 흘러왔다. 그럭저럭 대학생활을 하고 어렵지 않게 취직해서 일을 하다가 결혼을 하고, 중국에 오게 되고, 일을 그만두고, 아이를 둘이나 낳고. 앞으로만 앞으로만 나아가다가 이제는 점점 뒤를 돌아보게 된다.


아이를 키우며 자꾸 어린 시절의 내가 보이고, 나는 그때의 엄마가 된다.

그리고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김밥을 싸줬을 때 차서 배탈이 날 지도 모른다는 걸 생각 못할 정도로. 김밥을 싸줘서 아이가 수능을 망쳤나 보다고 그 누구보다 엄마 스스로를 원망했을 그때의 엄마 마음이 이제야 다가온다.


엄마가 서투른 엄마에겐 누가 손 잡아줬을까.



결혼하고 해외에 살게 되면서 명절 때 한국에 들어갔다 올 때면 항상 눈물을 훔치는 부모님의 뒷모습을 보게 된다. 어릴 땐 별로 해 본 적이 없는 포옹도 한다. 아이들 손을 잡고 리무진 버스에 올라타 한 발 한 발 옮기다 자리에 앉으면 꾹 눌렀던 눈물이 터져 나온다. 비행기로 한 시간 반 거리. 그리 먼 것은 아니지만 바다를 건너는 만큼 심적 거리는 시간과 비례하지 않는 게 분명하다. 일 년에 두어 번 보면 남은 날은 며칠이나 될까 하는 생각을 하다 보면 눈을 깜빡일 수가 없게 된다.


누구나 겪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는 말은 진리이다. 알고 있는 것과 절절히 느껴보는 것은 그 전과 후가 다르다. 인간이란 왜 지금 아는 것을 그때는 모르고 살아가는 존재인지 반문하면서도 또 이제라도 알아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남은 것은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겠지. 알지 못해서 하지 못하는 것보다 아는데도 불구하고 하지 못하는 것이 더 부끄러우니까.


우리의 시간은 생각보다 짧고 소중하다.

그때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내가 육아를 열심히 하는 이유, 육아가 힘들지 않은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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