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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원 Nov 18. 2020

다름과 고유함

중국 연길에 다녀와서

지난 주말, 중국 선양에서 고속 열차로 4시간 거리에 있는 연길에 다녀왔다.

연길, 연변 조선족 자치구.


갑작스러운 1박 2일의 일정은 다름 아닌 비자 연장 때문이었다. 남편이 회사 연길 법인 소속으로 되어 있어서 비자 연장도 그쪽으로 가서 해야 한다는 것이다. 6살, 4살 두 아이들까지 모두 직접 방문하여 지정 장소에서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이유였다. 아이들까지 직접 대동하지 않아도 해결할 수 있는 일 아닌가, 대안은 몇 가지나 제시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이 곳에서는 이유 불문 따르는 것이 원칙임을 이미 익히 알고 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는 보통 삶을 대하는 훌륭한 자세로 여겨지지만 때로는 개개인의 의지가 통용되지 않음으로 인해 요구되는, 선을 넘은 자기 합리화이기도 하다.     


그렇게 피할 수 없음을 감지한 후 즐거움이라는 의무를 떠안은 채 떠났던 연길 여행. 6살 4살 어린아이와 함께 하는 여행이란 예측 불가함 그 자체이지만 눈 앞에 놓인 새로움을 보고 즐기는 눈을 공유받을 수 있다는 큰 장점을 가지고 있다. 무미건조한 창 밖 풍경이 4시간 동안 계속되는 기차 안에서의 즐거움은 뭐니 뭐니 해도 먹을거리였기에, 둘째는 기차 안에서 작은 손으로 말랑말랑한 귤을 쥐어 잡고 야무지게도 까먹었고 또 바나나를 들고 몇 입 베어 물다가, 그 야무짐이 무색하도록 한 순간에 욱 하며 게워내기도 했다. 기차 안이 떠나가라 우는 소리를 들으며 겨우 토사물을 치워 내고 나서 숨 돌리기가 무섭게, 창 밖의 무언가를 보고 또 낄낄대기 시작하는 아이들. 토한 건 토한 거고 재밌는 건 재밌는 거니까.

기차역에 도착하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역 간판이었다. '연길 서역 (延吉四站)’. 조선족 자치구답게 대부분 한글과 한자 표기가 나란히 같이 되어 있었고 어디든 쌍둥이처럼 붙어 다녔다. 일란성이 아니라 이란성 쌍둥이겠지 라는 생각을 하며, 지난여름 왔었던 기억을 더듬어본다. 두 번째 방문이긴 하지만 여전히 낯설다. 여자는 녀자로, 버스는 뻐스로 표기된 한글들을 보며 중국의 다른 도시들과는 또 다른 종류의 낯섦을 느낀다.




역에 도착한 후에는 또 바로 회사 직원들이 우리를 픽업하러 나왔고, 곧바로 비자 관련 일정을 처리했다. 오늘 내로 처리하지 못하면 주말을 지나 월요일까지 머물러야 하기 때문에 식당에 들러 밥 먹을 시간도 없이 부랴부랴 움직여야만 했다. 행정 업무는 또 어찌나 느린지, 지친 아이들에게 간식을 먹이면서 나는 조금씩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중국 정부에서, 상부 어딘가에서 지시가 내려온 일이니 이 방법밖에는 없는 것이다. 무조건 이 곳에 와서 사진을 찍어서 내야 하고, 실물을 확인해야 하고, 그리고 그들에겐 매일 반복되는 느긋하고 심드렁한 업무 처리를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증명사진을 찍으러 들어간 방에서 나보다 먼저 들어온 한 여자가 사진을 찍고 있다. “고개 조금 내리시고, 왼쪽으로 조금, 시선 여기로.” 찰칵!  그다음 내 차례다. 그 여자가 방금 옷걸이에 벗어놓은 까만 정장 재킷을 집어 들어 입은 다음 같은 의자에 앉는다. “고개 내리시고, 조금 더, 왼쪽으로 조금, 시선 여기로.” 찰칵! , 나는 무표정으로 카메라의 렌즈를 응시한다. 다음은 아이들 차례. 노란 불빛 아래 환한 표정의 아이 얼굴에 점점 미소가 번진다. “고개 내리고, 그렇지.” 사진사는 잠시 아이 얼굴을 바라보다, 찰칵한다. 이 방에서 사진을 찍은 사람들은 모두 같은 컴퓨터 안에 저장될 것이었다. 그 폴더를 클릭하여 열어보는 것을 상상해본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까만 재킷 안의 오목조목한 이목구비들이 제대로 보이기는 할까. 입으면 곧바로 한 마리의 끔찍한 벌레가 되어버리는 것만 같은 까만 재킷과 늙은 사진사가 있는 이 작은 방에서 아이는 홀로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수많은 제도들과 to do 리스트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똑같은 까만 재킷의 껍데기를 입고 있는 벌레가 아닐까 생각하며 카프카 '변신'을 떠올린다. 모두에게 까만 재킷을 입히고 있는 심드렁하고 무관심한 그들에게, '먼 곳에서 기차 4시간 타고 오느라 지쳤어요, 아이들이 배고파요'라고 말하고 싶어 지는 것은 지질한 인간다움인가 아니면 돼먹지 않은 까칠함인가? 평화롭게 앉아 대기하는 다른 사람들을 보며 나도 애써 평화로워지고자 .




작은 혼돈에서 나를 구해준 것은 짜장면이었다. 남편은 비자 일정이 끝난 후 곧바로 회사로 떠났고 나와 아이 둘은 고픈 배를 움켜쥐고 근처 식당으로 향했다. 마침 근처에 짜장면집이 있었고 아이들은 언제나 짜장면을 환영하니까. 그곳에서 먹은 짜장면과 탕수육은 한국에서 먹는 맛 그대로였다. 아니, 더 맛있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한국식 짜장면이었다. 이 정도면 아마 한국에서 배워온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엔 연길 출신인 조선족 친구가 소개해준 맛집들을 하나씩 방문했다. 시간이 부족해 모두 가보진 못했지만 이 곳에서 꼭 먹어봐야 할 음식을 꼽자면 양꼬치, 냉면, 찹쌀순대를 들 수 있다. 전날 먹었던 짜장면과는 달리, 이 음식들은 미묘하게 달랐다. 양꼬치는 쯔란이라는 중국 향신료를 혀서 먹어야 제맛이며, 냉면에는 닭고기를 뼈째 갈아 만든 완자가 들어있었고, 당면 순대보다는 비릿한 찹쌀순대다. 한국음식도, 중국음식도 아닌 것이 익숙한 것도 낯선 것도 같다. 예상보다 은근 잘 어울리는 조합이 입 안에 엉겨서 감돌았다. 오묘하고도 매력적인 그 맛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 3세대 전쯤, 일제시대 전후 넘어가서 새로 터전을 잡았을 사람들을 떠올리게 했다. 언제부터였을까, 묘하게 섞인 이 음식들은, 두 가지 언어가 섞인 채로 살아가는 이 곳 사람들은..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짜장면보다 양꼬치, 냉면, 찹쌀순대가 좋았다. 내 입에 딱 맞지는 않았지만, 그 자체로 매력적이었던 그 맛 때문에. 마트에 진열되어 있는 최신 한국 제품들보다, 한국의 맛 그대로를 찍어낸 듯했던 짜장면보다, 훨씬 더 기억에 남는다. 나는 여행에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고유함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다. 고유함이란 과연 언제 적부터 존재하는 고유함일까?  그렇다는 말은 어째서 쉽게 반박할 수 없을까? 이질적인 것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는 고유함은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는 것일까? 때로는 고유함이란 이름으로 그저 똑같은 틀을 찍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그리고는 너와 내가 만나서 다름을 인정해가며 하나가 되어갈 때, 비로소 가치 있는 고유함이 탄생하는 것 아닐까 하는데 생각이 다다른다. 서로 다른 것들이 적절한 융합을 이루었을 때 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매력적인 고유함이 만들어지기도 하니까. 쯔란과 양꼬치가 만나 이 곳의 대표 음식이 된 것처럼..




중국은 지금 코로나 전 후로 나뉘며, 코로나 이후 보이지 않는 대 통합이 이뤄지고 있다고 한다. 중국 대륙 끄트머리에 있는 이 조선족 자치구도 예외는 아니다. 최근 조선말로 수업하는 조선족 학교의 선생님들은 한족 선생님들로 교체되고 있으며 학교 안에서 쓰는 교과서도 내년부터는 중국 교과서로 싹 다 바뀔 예정이라고 한다. 과거에는 연길 어느 곳을 가든 조선말이 통용되었다고 하는데, 요새는 조선말 대신 당당히 중국어를 요구한다는 조선족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사진을 찍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한번 더 얼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중국 사회에서 가장 반성적 사유가 필요한 부분은 바로 다른 목소리에 대한 포용이다. 다른 목소리에 대한 포용에서 시작하여 언론의 개방과 자유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다른 목소리의 포용은 수천 년 동안 인류문명 정도의 척도였다. 마오쩌둥은 “남들에게 말을 하게 해야 하늘이 무너지지 않는다”라고 했고 덩샤오핑은 이른바 ‘흑묘백묘론’을 주장했다. 시진핑 주석의 아버지 시중쉰도 “어떤 사람의 발언에 대해서도 동의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사회가 일반 개인들에게 사회의 나사못이 될 것을 요구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결국 우리에게 반성적 사유가 필요한 부분은 책임소재의 파악과 인심의 재건이다.

관용과 포용이 없는 사회에서는 사람들의 사상과 관념이 ‘중세에 머물러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 상태에서 G2의 찬란함과 위업을 거론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중국 소설가 옌렌커의 특별기고, 매일경제, 20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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