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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원 Dec 08. 2020

쓴 맛, 단 맛

엄마로 살아가는 삶은 가혹하다

가끔씩은 가혹하다.

엄마로 살아가는 삶이란 게.


어느 정도는, 노력만 하면, 마음먹은 대로 일구며 차곡차곡 살아갈 수 있었던 부모세대들이 우리를 바라보았던 눈은 참으로 반짝였을 것이다. 이 아이가 컸을 때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지금도 이렇게 확확 변하는데 그때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엇이 있을 거야. 그게 무엇이든, 우리 아이는 그곳에서 빛나고 있을 거야.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실제로도, 세상에 없던 것들이 하나 둘, 그야말로 탄생했고, 가능성에 대한 희망은 점점 커져만 갔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 공부가 쉬웠다는 말은 항상 식탁 위에 올라와 있었다. 내가 몸담고 있었던 재능을 들여다보기보다는, 그 테두리 밖의 것들도 할 수 있을 거란 가능성에 대한 무한한 희망만이 커져갔었던 그 시절. ‘나는 할 수 있다’에 취해있었던 그때.


나뿐만 아니라 주위를 둘러봐도 모두들 참 열심히 살았다. 어린아이들의 머리는 세상을 향해 깨어있었으며, 대학시절엔 취업을 위해, 회사에는 꿀단지를 숨겨놓은 듯 그렇게. 모두 무언가가 되기 위해 달리는 모습을 하고 살았다. 그리고 나도 물론, 그 무리에서 빠지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살아갈수록 나에게는 이름 말고도 사는 곳, 출신 대학, 직장 등 나를 수식하는 몇몇 명사들이 따라붙었고, 회사 이직을 할 때, 결혼을 할 때도 나는 내 입에서 나오는 명사의 무리들과 함께 움직였다. 작은 우여곡절은 있었어도 대체로 그 테두리 안에서 지냈다.


그러다가 결혼을 하고 임신을 하고 그토록 바라던 ‘엄마’라는 명사를 하나 더하게 되었을 때, 나는 더할 나위 없는 행복감과 함께 이름 모를 상실감을 겪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나는 원래부터 아이를 키우면서 일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지 않았다.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아이를 갖고 싶었고, 두 번 생각할 필요 없이 일보다 아이가 우선이었다. 남편을 따라 중국에 오면서 일을 그만두긴 했었지만, 일을 그만둔다는 아쉬움보다는 학교를 다니고 중국어를 배우며 나의 가능성을 연장하고자 하는 기대와 바람이 더 컸다. 아마도 막연히, 아이를 낳고도 자투리 시간 단 한두 시간은 내 것이라 생각했었던 모양이다. 한두 시간 정도는 나에게 투자하여 내가 원하는 성과를 이뤄낼 수 있을 정도의 치열함은 갖고 있다고 의심의 여지없이 믿었다.


하지만 그건 내 오산이었고 현실은 그야말로 ‘녹록지 않았다.’ 두 아이를 키우는 6년 동안, 나는 지금도 처음 그 자리 그 언저리에 그대로 있다. 엄마로서의 나의 역할을 사랑하고, 아이들에게 좋은 엄마로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상실감만큼은 어찌할 수가 없다. 아마도 ‘너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다’라는 주입식 교육의 폐해일지도 모르고, 혹은 그냥 단순한 핑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핑계를 대더라도, 엄마로서의 내 모습을 더없이 사랑한다 하더라도, 나로 살아왔던 내 존재의 일부를 잃는다는 상실감만큼은 다른 이야기인 것이다. 홀로 서서 두 가지 모두를 손에 쥐었다간 와르르 무너지는 마법의 신전과도 같이, 이 시대 엄마가 서있는 자리는 그렇다.


그렇게 나는 엄마가 되고 나서 무언가를 갖지 못하는데서 오는 처절한 아쉬움을 알았다. 나의 수식어는 ‘엄마’라는 하나의 명사로 줄어들었으며,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진다는 시간조차도 더 이상 내 소유가 아닌 것처럼 흘러갔다.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종류의 충만함을 손에 움켜쥐려면, 나머지 한 손은 완전히 스르르 놓아버려야만 한다는 걸, 내 존재의 일부가 흘러나가는 걸 지켜보아야 했다.


결국, 노력만 하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인생은, 그렇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다시 삶에 대한 선택권이 주어진다 해도 나는 엄마로서의 삶을 선택할 것이다.

거기에는 내가 이 만큼까지라 여겼던 행복의 최대치가 없다. 경계가 어디일지 모르는 가열된 따뜻함이 있다. 엄마가 되지 않았다면 몰랐을 느낌이다. 그리고 엄마가 되지 않았더라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존재의 귀함 역시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열심히 노력했는데도 무언가 이루지 못했더라면 아주 쉽게, 나를 보잘것없이 여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지금 이 작은 아이들에게 유일무이하고도 귀하디 귀한 ‘엄마’라는 존재이다. 엄마라는 존재 가치로부터, 그리고 처절한 아쉬움으로부터 나로 살아왔던 내 소중한 존재의 일부 또한 귀하게 여기는 법을 배운다.



여전히, 때로는 가혹하다.

남편과 싸워도 화해할 시간은 허락되지 않은 채 아이들에게 웃어 보여야 하는 것도 가혹하고,

바람이 코를 간지럽힐 때 되지도 않는 청춘의 마음을 가져보는 것도 가혹하다.

나는 생각하고 행동하는 인간인가, 아니면 오로지 기능하는 인간인가를 반문해야 할 때도 있다.

목이 찢어질 것 같고 눈꺼풀이 무거워 죽겠는데 이 한 몸 눕히지 못할 때도 물론 무척 서럽다. 

지금 나는 엄마로 살아가며 제대로 쓴 맛, 단 맛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그래도, 아무리 달콤한 하루라도, 365일 x10 을 갖다 준다면 사양하겠다. 달콤함에 마비되기보다는 쓴 맛, 신 맛, 단 맛이 조화롭게 감도는 맛의 깊이를 즐기고 싶다. 반복되는 달콤함과 평온함 대신, 오늘에 대한 아쉬움과 내일에 대한 기대감으로 살아가고 싶다.


쓴 맛, 단 맛 속에 지나가는 오늘 하루도 너희로 인해 특별했던 것에 감사하며..

오늘도 나 스스로를 두고, 너희를 두고, 우리의 모습을 두고 꿈을 꾸며 좋다고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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