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터에 가면 뛰어노는 아이들 곁에서 유모차를 밀며 담배를 피우는 할아버지가 있다. 그 역시 내 취향이 아니다.
중국 친구 가족의 초대를 받아 외식하러 갔는데 멀겋고 하얀 국물에 민물생선이 둥둥 떠있다. 억지로 한 입 떠먹었는데 생선 비린내에 시큼한 국물이 더해져 조금도 보태지 않고 구역질이 난다. 못 먹겠다고 대놓고 말하지 않으면 알아차리지 못한다. 아니, 말해도 한 번 더 권한다. 호의는 감사하지만 배려는 부탁드린다. 6살짜리 아들에게 벌어진 상식 밖의 해프닝들 역시, 가끔 취향을 넘어 참을 수가 없다.
조심스럽게 피치 못할 사정을 전달했을 때도, 사람 좋은 남의 편이 의례 한 번 더 제안하면 그로부터 직진이다. 액면 그대로의 소통. 싫은 마음을 내 안에서 대충 뭉뚱그려 뻥 차 버릴라치면, 뭔가가 부딪혀 툭 하고 부러진다. 마음속 깡통만 요란하다. 아닌걸 아니라고 잘 거절할 수 있는 것도 정말이지 능력이다.
어른이 되면,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고 사는 삶이 있을 거라 막연히 생각했다. 온전한 나의 선택이 만들어낸 삶 속에서의 만족감을 꿈꿨다. 하지만, 가지 치는 길을 따라 당도한 미로 저 끝에는 나의 선택에서 나온 우연의 합들로 가득하다. 마땅하다 여겨지는 기준 밖의 세상이 존재한다.
나야말로 나와 다른 것을 1도 품지 못할 정도로 편협하고 이기적인 인간인가를 반문해본다. 동시에 그것들을 반드시 꼭 품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마음 한편에서 스멀스멀 올라온다. 시도해 보고, 손 내밀어봤는데도 싫다면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나이 마흔 정도 되어서는 어느 정도 한 인간으로서의 결이 생겨있기 마련이고, 대단치 않은 이유로 그 결을 헤집어놓을 이유는 없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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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마인드’는 환영받는다. 새롭고 다른 견해를 잘 받아들이는 마음.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이 시대의 중요한 스킬이라 일컬어진다. 진보적이라 평가받는다. 현재에 눈 뜬 진정한 ‘오픈마인드’는 대찬성이지만, 오픈마인드라는 이름으로 강요되는 편협함은 용기 내어 정중히 사양하련다. 다름은 언제나 환영하되, 도덕과 가치의 기준이 맞닥뜨리는 일에 있어서는 나의 기준을 고수하련다. 어차피 이 넓은 땅 아니라 그 어느 곳에 발 딛고 살아가든 좋음이 있으면 싫음도 있기 마련이니까. 그 안에서, 속이 부러지다 못해 바스락대는 소심한 여편네로, 혹은 잔소리꾼 아주미로 나이 들어가지 않길 바라는 작은 바람이 하나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