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어를 배운다는 것
가능하면 영어로 먹고살고 싶었는데, 팔자에도 없던 중국어를 공부하고 있다. 중국에 산지 벌써 8년째이니 이 정도면 마음에 안 들어도 팔자엔 들여야 할 모양새다. 사실 중국에 살고 있으니 새로운 언어를 배우기에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다 싶으면서도 두 살 터울 어린아이 둘을 키우다 보니 공부라는 게 만만치는 않다. 지지부진한 마트용 중국어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아이들이 유치원에 다니게 된 이후 중국인 선생님(푸다오)을 구했지만 수업 외 시간의 투자가 없으니 실력은 언제나 그 언저리에 머물렀다.
특히 주재원 가족으로 살다보면 중국인들과의 접촉 없이, 그야말로 1도 없이, 생활이 가능하다는 걸 알게 된다. 물건 살 때는 가격을 보고 핸드폰 웨이신으로 결제하면 되고, 요즘엔 식당에서도 테이블마다 주문용 큐알코드가 붙어 있다. 생활권도 인맥도 모두 작은 한인 사회 안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둘째 아이 어릴 때 6개월 정도 중국인 보모를 써봤지만 그 이후엔 두 아이 육아도 쭈욱 내 손으로 했다. 표면적인 접촉을 제외하고는 그들의 생활에 깊이 들어가 볼 기회도, 대화다운 대화를 나눌 기회도 전무했다. 아이들이 어릴 땐 더욱 그랬다. 집안에만 있다 보면 여기가 한국인지, 중국인지 알 수 없었고 알 필요도 없었다. 몸만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대륙 북방 언저리에 툭 떨구어져 있었다. 그 속에 발 들이지 않은 이방인의 느낌은 그랬다. ‘이렇게 이질적인 존재가 분명히 이국의 땅에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그 이질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스스로가 생각하는 나는 이질적이었다가도, 쉽사리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리고 만다.’
아마도 아이들이 기관에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였을 것이다. 나의 존재감을 다시금 확인하게 되었던 것은. 가능하면 첫째를 36개월 정도까진 집에 데리고 있고 싶었는데 돌도 안된 신생아와 3살 된 아이를 하루 종일 같이 돌본다는 건 어떤 면에선 불가능했다. 처음엔 중국인 보모의 도움을 받았으나 엄마 바라기인 첫째 아이는 엄마에게, 둘째는 보모 품에만 있게 되는 걸 보고 시간을 줄였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예 그만뒀다. 한참 빛이 났던 첫째를 잘 돌봐주고 싶었고, 이제 막 빛을 발하는 둘째도 언제 남이 될지 모르는 남의 손에 맡기기 싫었다. 나는 대단한 엄마 코스프레를 하는 게 아니었는데 사람들은 유별나다고 했고 그렇게 하지 않아도 애는 알아서 잘 큰다고 했다.
첫째를 유치원에 보내볼까 하고 아파트 단지 안에 있던 한국 유치원에 보냈는데 한 달 정도 다니다 다시 일 년간 가정보육을 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공개할 수 없지만 그만두면서 원장 선생님에게 유치원에 cctv 달 것을 권유했고 나중엔 선생님이 집에 찾아오셔서 사실은.. 이라며 해명한 일이 있었다. 납득할 수 있었지만, 유치원에 보내지 않기로 결정했다. 나에겐 그뿐이었는데 그러고 나서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이상한 소문 퍼트리고 선생님 괴롭히지 말라고, 행동 조심하라는 메시지를 받기도 했다. 아마 그 어느 때 보다도 이 곳에서의 나의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었던 때가 아니었나 싶다. 그렇게 일 년의 가정보육 후 아이를 중국 어린이집에 보내기 시작했을 땐 조선족 선생님이 계셔서 어느 정도 소통이 되었지만 좀 더 큰 중국 유치원으로 옮겼을 땐 그야말로 리얼 중국 생활에 뛰어들게 됐다. 나의 간헐적 언어 좌절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내가 사는 이 곳 동북 지역 중국어의 특징은 ‘웅얼거림’이다. 보다 전문적으로 말하자면 ‘儿(얼)화’라고 한다. 웅얼웅얼.. 얼얼얼.. 미안하지만 속으로는 ‘말이야 방귀야’를 읊조리던 시절이 있었다. 물론 지금도 못 알아들을 때가 많지만 다행히 이제는 그 안에 담긴 의미에 집중하느라 듣는 도중 얼토당토않은 딴생각은 접을 수 있게 되었다. 문제는 나의 좌절감이었다. 원래도 좌절을 잘하는 타입인데 말을 주고받을 때마다 조금씩 좌절감을 느끼다 보면 이 땅에서 어찌 살아갈까 싶었다. 사실 그 순간의 무안함만 벗어난다면 아무 문제없었고 그들에게 어차피 나는 외국인이라 그 정도의 감정 따위는 마음에서 무시해버리면 될 텐데 쉽게 그러질 못했다. 모든 감정에 머물러 있는 시간이 길었고 미련하게도 지우는데 오래 걸렸다.
상해, 북경 같은 큰 도시들과는 달리 이 곳 선양에는 외국인들이 상대적으로 적은 데다가, 한인 밀집 지역 또한 군데군데 흩어져 있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한 나에게는 당연하게도 중국말이 건너왔고 그런 스스럼없는 중국사람들에게 나는 대부분 당혹감을 안겨주어야만 했다.(아마도 나 혼자만의 것이었을 테지만)
“쌍둥이예요?” “몇 살 차이예요?” “엄마 혼자 둘을 보는 거야?”
두 아이를 데리고 다니다 보면 자주 들리는 질문이었고 끄덕이거나 간단한 대답을 하면 대화는 거기서 더 길게 이어졌다.
“아이 마야~ (동북 사투리)” ~~~~
오늘의 대화 상대는 바로 나란 듯이, 할머니나 보모 없이 남자아이 둘을 데리고 다니는 흔하지 않은 풍경에 애정을 담아 염려하고 격려하며 이야기를 쏟아붓는다. 그러면 나는 말을 중간에 자를 수가 없어 어정쩡하게 다 끄덕이며 듣고 있다가
“아.. 저.. 근데 저 한국인이라서, 다 못 알아들어요.”
그러면 그 아줌마는 한 발짝 다가와 내 얼굴을 한 번 들여다보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원래 가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식당에서, 병원에서, 아이 유치원에서도 하고 싶은 말을 다 못 한다는 것, 서로가 당혹스러워진다는 것이 어떤 날에는 정말 싫었다.
남편에게 푸념하니 HSK 시험을 보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솔깃했다. 시험 결과를 써먹을 곳은 없겠지만 목표가 생기고 그걸 향해 공부하는 과정이 즐거울 것 같았다. ‘맞아, 단어량부터 늘려야 해. 시험 준비를 하다 보면 어느새 실력이 늘어있을 거야.’ 하는 생각을 하며 푸다오의 도움을 받아 HSK5급을 준비했고 간당간당하게 통과했다. 물론 그런다고 말을 갑자기 잘하게 되는 건 아니었지만 그와는 별개로 엄마로만 살던 나에겐 큰 의미가 있었던 하나의 사건이었다.
여전히 한 순간에 바보가 되어버릴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 외국어를 배운다는 것은 멋진 일이다.
1. 얼마 전 아이 유치원 친구 엄마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가 친구가 된 그녀와 그 남편의 나이를 아직 모른다.
조심스럽게 나이를 묻고 호칭을 정해야 할 필요가 없으니 그냥 친구가 될 수 있다.
2. 아이 피아노 선생님이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 해서 언어 교환을 하는데 대화를 나누다 보면 표현방식의 차이에 가끔 흠칫 놀란다.
예를 들면 “이제 갈까요?”는 “走!” 한 마디로.
“이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는 “这样吧” 로 보다 직접적이고 간단해진다.
빙빙 돌려서 이야기하는 법이 잘 없고 단어의 나열만으로도 표현이 될 때가 많다.
(물론 좋은 면만 있는 건 아니다.)
3. 언어교환하는 학생이 내가 중국어 공부할 좋은 책을 구했다며 가져왔는데, 보니까 초급 단계였고 단어들이 너무 쉬웠다. 그래서 여기 있는 단어들 다 아는데 단계를 높여서 책을 바꿀 수 있을까 물어봤더니
“여기 있는 단어 다 안다고요? 근데 왜 말을 못 해요?”
돌리는 법 없는 너무도 정직한 직격탄에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껄껄거리는 어이없음이 터져 나오기도 한다.
단순한 문화 차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언어가 가진 고유함이 미치는 영역이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모국어로 사고하고 이를 테두리로 생각하는 우리에게 또 다른 언어가 작용하는 조금 다른 사고(思考)를 겪어볼 수 있다는 건 어쨌든 간에 꽤나 매력적인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