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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원 Apr 15. 2021

어른이 된 나를 사랑하는 방법

[독서노트]어른이 되어 그만둔 것

어른이 되어 그만둔 것.

책 제목부터 흥미로웠습니다. 어른이 되어 깨달은 것, 어른이 되어 알게 된 것이 아닌, 어른이 되어 그만둔 것이라니요.

‘그만둬라, 하지 말아라’라는 말에 이토록 끌린 적이 있었던가요.


저자 이치다 노리코는 일본의 프리랜서 에세이스트이자 매거진 기획자입니다. 50대에 들어서며 불확실하고 막연한 세계 속에 나를 맞추기보다 나 자신에게 잣대를 두기로 하고, 삶에서 하나둘씩 그만둔 것들을 책에 담았다고 말합니다. 일, 관계, 일상, 스타일로 구분하여 그만 두기로 시작한 건 총 서른네 가지. 작가는 다정하고도 따뜻한 말투로 그만둬도 되는 것들에 대해 격려합니다. 그만둬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행복해진다고요.

나이 마흔을 코앞에 둔 지금의 저에게도 공감 가는 말들이 많았습니다. ‘완벽한 청소를 그만두다, 헬스장 등록을 그만두다, 예쁘고 불편한 구두 신기를 그만두다, 멋 부린 티가 나는 멋 내기를 그만두다’와 같은 페이지를 넘길 땐, 멋진 정보가 가득한 세련된 잡지를 읽고 있는 느낌도 들었지요. 당장이라도 따라 해보고 싶은 생활의 팁은 덤이었고요.


그런데 저는, 이 책을 읽고 많이 아팠습니다.

재미있게 술술 읽어 내려가 놓고 책을 덮은 후엔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자꾸 흘렀습니다.

책을 다 읽은 건 한참 전인데, 쉽게 독서노트를 써 내려가지 못했습니다.


결점 고치기를 그만두다

‘쓸데없이 열심히’를 그만두다

‘조금만 더’를 그만두다

‘그래도 남들만큼’을 그만두다

칭찬을 기대하는 마음을 그만두다

정면돌파를 그만두다

목적에 충실한 삶을 그만두다

인생의 정답 찾기를 그만두다


언젠가부터, 꽤 일찍이, 이미 그만두었던 것들입니다. 한참 앞으로 달려 나가야 했을 시기, 남들만큼을 바라며 시기도 질투도 했어야 할 시기에 저는 마음에서 많은 것들을 내려놓았던 것 같습니다. 너무 빨리 어른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아니, 어른이 된 척 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책을 읽다가 중간중간 저자에게 묻고 싶었습니다. 지금 성공한 프리랜서 에세이스트가 아니라 하더라도, 이 많은 것들을 그만둘 수 있나요? 외부의 시선을 거두고 온전히 자신 안의 잣대로 스스로의 가치를 발견하는 일이 과연 어느 정도 가능한 일일까요?라고 말이에요. 행복은 자신의 힘으로 낚아채는 것이 아니라 그저 때가 되기를 기다리다가 툭 떨어지는 과실을 줍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는 저자에게 질투가 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에게 행복이란 오랜 시간 기다리고 애써서 겨우 손에 쥔 작고 소중한 씨앗 한 톨과도 같았으니까요.  


나를 스쳐 앞으로 달려가는 수많은 이들을 바로 곁에서 바라만 봤습니다. 세상은 목표한 것을 성취하고 이룬 사람들, 그것으로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 천지였어요. 내가 원하는 모습이 아니라 세상이 원하는 모습을 위해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학습된 기대만큼, 딱 거기까지만 충족시킬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진심 어린 마음도, 열정도, 아무것도 없는 가짜 노력이었어요. 세상의 눈은 한 사람의 가치를 쉽게 헤집어 놓았습니다. 휘둘렸던 저는 앞으로 나아가기보다, 나를 아프게 하는 것들로부터 먼저 나를 지키기 위한 노력을 해야 했습니다. 책에서와 같은 여유로운 마음으로는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나를 보는 시선들에 반항이라도 하듯 치기 어리고 아집스러운 마음이었던 반면, 자포자기하는 마음의 설익은 절망이기도 했습니다. 이만큼이면 됐지? 그런데 딱 여기까지야. 칭찬 따윈 바라지 않지만 부딪히지도 않을 거야. 결점 그대로, 내 모습 그대로. 그리고는, 때론 버텼고 때로는 한없이 무력해졌습니다.


인생의 후반부에 접어들며, 안정적인 행복을 위해 하나둘씩 버리기 시작하는 저자의 생각을 읽으며,

 ‘불안’ 속에서도 어쩔 수 없이 행복을 좇던 그 시절, 하나둘씩 버리기 시작했던 어린 나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그때 열심히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봤던 ‘불안’ 이 ‘어른이 되어 그만둔 것’과 겹쳐집니다.

모든 것을 기대하도록 학습받으면 많은 것을 가지고도 비참할 수 있다. 우리는 조상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기대한다. 그 대가는 우리가 현재의 모습과 달라질 수 있는데도 실제로는 달라지지 못하는 데서 오는 끊임없는 불안이다. (불안, 알랭드 보통)
아무리 애쓴다 해도 내 결점은 고쳐지는 것이 아니구나. 비로소 못하는 것을 어떻게든 해보려고 애쓰기보다는 가볍게 내려놓는 편이 훨씬 편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른이 되어 그만둔 것, 이치다 노리코)

누구나 잘하는 것이 있고,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뭘 잘하고 뭘 못하는지는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바라볼 때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할 수 없는 것’에 쉽게 포커스가 맞춰집니다. 외부의 기대에 따라 할 수 있는 것을 쉽게 버리고 할 수 없는 것, 즉 결점에 더 집착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결점은 잘 고쳐질 수 없기에, 스스로에 대한 그 많은 기대들을 충족시킬 수 없기에, 우리는 많은 것을 가지고도 쉽게 비참해지는 게 아닐까요.


우리의 에고나 자아상은 바람이 새는 풍선과 같아 늘 외부의 사랑이라는 헬륨을 집어넣어주어야 하고, 무시라는 아주 작은 바늘에 취약하기 짝이 없다.
(불안, 알랭드 보통)

우리는 홀로 살아갈 수 없는,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인간입니다. 내가 바라보는 세상이 나를 마음대로 재단해버릴 수 없도록, 필요 없는 것들을 버리고 나 자신에게만 집중하고 싶지만 자신만의 잣대를 가지고 나를 보는 일이 마음처럼 쉽진 않습니다. 여전히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 본 자아상에 민감해지기도 합니다. SNS 팔로워 수, 구독자 수에 민감하지 않을 수 없는 건 외부의 사랑이 필요한 자연스러운 본능 그 자체 때문이기도 하니까요.  





인생의 전반부를 살아오기까지 저는 한 번도 제가 좋아하는 것에 열심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에 적당히 애썼지요. 이제는 잘 그만두되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살아가려고 합니다. 조금만 더 해보려고 합니다. 회사 다녔을 때 아무리 해도 말 잘하고 소통 능력 있는 기획자들을 따라갈 수가 없어 좌절했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사실 전 기획서와 카피를 잘 쓰는 사람이었던 거예요. 지금 육아도, 글쓰기도, 외국어 공부도, 살림도 다 잘하려고 애쓰는 대신 완벽한 청소는 그만, 외국어 공부는 선생님의 도움을 받고, 육아와 글쓰기에만 좀 더 힘을 쏟아부으려 합니다. 책을 읽고 나니 그것만큼은 조금도 게을러지고 싶지 않아졌어요. 하고자 하는 것을 한두 가지로 줄여서 집중한다면 내일 할 일을 오늘 앞당겨해야 할 필요도 없어질 테니까요. 그렇게 집중하겠다는 건 ‘그만두기’의 리스트가 가득한 이 책과 언뜻 반대되는 말 같지만, 사실 책에서 제가 찾은 메시지는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버리라는 말은, 조금만 남겨두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만두라는 말은, 지금 하고 있는 것 말고 다른 것을 시작하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마지막 페이지에서, 저자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무언가를 그만두는 일은 지금껏 걸어온 길의 바로 옆에 또 다른 길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과정이었습니다. ‘못하는 일’을 그만둬 보면 내 안의 힘을 통째로 ‘할 수 있는 일’에 쓸 수 있어요. 그것이 바로 제가 찾아낸, 저를 효율적으로 쓰는 좋은 방법입니다.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연료에 불이 붙으면 더 편하게, 더 멀리 기분 좋게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만두는 것의 핵심은 바로 이것에 있었다는 걸, ‘그만둔다’란 버리고 포기하고 미루기만 하는 무력한 상태의 지속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이번 책을 읽으며 감사히 깨달아갑니다. 그만둔다는 것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여 단 하나에 내 안의 힘을 제대로 쏟아붓기 위한 과정이라는 것을, ‘이게 아니면 안 돼’라는 집착을 버리면 선택지가 늘어다는 사실을.. 그리고 남이 보는 나를 위해, 결점을 바꿔놓기 위해 너무 애쓰지 말자고, 내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 그걸로 나의 가치를 발견하면 된다고 말이에요. 그것이야말로 진짜 어른이 된 나를 사랑하는 방법이지 않을까, 행복에 가까워지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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