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한국에 들어가서 서점을 둘러보거나 밀리의 서재를 통해 책을 읽는 걸로 갈증을 해결하곤 했었는데 그걸로는 뭔가 모를 아쉬움이 있었다. 그리운 한국 서점, 종이책에 대한 아쉬움은 말할 것도 없지만, 나 혼자 책을 읽는다는 것이 새삼 외로웠다. 어찌 보면 줄곧 그랬다. 가족 중에서 책을 읽는 사람은 나뿐이었고 책 읽기를 좋아했던 남편도 결혼과 육아 후 책을 접었다. (이에 대해선 글 한 편은 따로 족히 써야 할 듯하다.) 중국에 살게 되고 도시를 네 번이나 옮겨 다니면서 나를 잘 아는 사람들, 내가 잘 아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들었고 언젠가부터 ‘시간 있을 때 뭐해?’ 같은 질문에 ‘독서’라고 대답하기 힘들어졌다. 그렇게 대답할 만큼 많은 책을 읽는 상태도 아니었지만, 거기서 대화가 더 이상 흥미롭게 이어지지 않으리라는 걸 감지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다 브런치를 시작하게 됐고, 이 독서모임을 알게 됐다. 글쓰기도 그랬지만 서평이란 것도 제대로 써 본 적이 없었다.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다이어리에 짧게나마 꼭 끄적이긴 했었지만 모두 나를 위한 것이었고 누군가 보는 글을 써 본 적은 없었다. 그냥 떠오르는 생각이나 느낌을 받아 적듯 글을 쓰는 건 그래도 익숙했지만 책을 읽은 순간의 감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을 서평이라 쓸 수 있을까, 서평이란 고작 그런 것이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주저했다. 하지만 좋은 사람들과 같이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감정을 나눌 수 있다면 , 다른 건 조금 욕심을 내서 해봐야 하는 것 아닐까 생각했다. 이제 나에겐 그런 게 필요한 것 같다고..
그런 시작의 설렘과 ‘나의 아름다운 이웃’이 함께 내게로 왔다.
‘나의 아름다운 이웃’에 ‘박완서 짧은 소설’이란 부제가 붙어 있다. 단편이면 단편이지 왜 굳이 짧은 소설이라 했는지에 대한 의문은 책 머리말의 한 단어로 곧 풀렸다. ‘콩트’, 그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단편 소설보다도 짧은 소설. 대개 인생의 한 단면을 예리하게 포착하여 그리는데 유머, 풍자, 기지를 담고 있다.’ 고 되어 있다. 아, 나는 무식하게도 콩트 하면 개그 프로 꼭지가 먼저 떠올랐는데, 그러면서 ‘콩트’와 ‘짧은 소설’의 거리감을 포착하여 부제를 단 것에 감탄했다. 작가 스스로 70년대의 산물이라 하는 이 짧은 소설들은 분명 그만큼의 거리감을 담고 있다. 읽다 보면 시대에 뒤떨어진 표현들을 일부러 고치지 않았다는 말을 떠올리며 고개가 끄덕여지지만 그럼에도 그 시대 이웃들의 이야기와 그 안의 감정만큼은 지금 이 시대 이웃들과 선을 같이 한다.
짧은 소설 같기도 에세이 같기도 한 글들을 읽어 내려가다 보니 마치 브런치의 글들을 읽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브런치야말로 나의 이야기이기도 너의 이야기이기도 한 우리 이웃들의 이야기가 아닌가.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이 책의 짧은 소설들은 모두 휘리릭 점, 휘리릭 점, 하고 시선이 머무는 곳들이 많았다. 짧은 글이 한 편 끝났을 땐 날숨과도 같은 짧은 한숨과 함께 멍해졌던 때도... 잦았다.
처음엔 뚝뚝 끊기는 짧은 이야기들에 잠깐 엉덩이를 붙였다가 아이들 간식을 챙겨줬고, 또 무얼 하다 잠깐 한 편씩 읽기도 했다. 그리고<아직 끝나지 않은 음모>를 읽었을 땐 중간에 끊지 못하고 세 편을 내리읽고 말았다. 마지막 ‘칼아 되살아나렴’이라는 문장을 읽고 나서는 가슴이 서늘한 듯 동시에 터질 것만 같았다.
후남이는 거듭한 고배로 의식은 더욱 명료해져 눈 아래 거대한 도시, 그 갈피 갈피에 여자 길들이기의 아직 끝나지 않은 음모가 공룡처럼 징그럽게 도사리고 있음까지를 분명히 볼 수 있었다. 칼아 되살아나렴. 그녀는 주문처럼 이 소리를 외며 거듭거듭 고배를 들었다.
70년대의 후남이와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는 이전과 다른 시대에 살고 있음을 자축하지만 그 시대는 나로부터 뚝 떨어져 멀찍이 분리할 수 없는 것임을 절감한다. 마치 DNA와 같이 조금의 변형도 없이 고스란히 대물림되는 내 안의 조각들. 어떤 조각들은 너에게까지 대물림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문득 튀어나오는 조각의 그림자를 보고야 말 때가 있다. 언젠가 들었던 ‘네가 세상에 뚝 떨어진 줄 아느냐’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렇게도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인간인 체하지만 내 안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존재할까. 나의 엄마, 할머니, 할머니의 엄마로부터 이어져온 것들이 내가 발 딛고 살아온 땅만큼이나 나를 붙들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그리고 그렇게 거슬러 올라간 이해 없이는 그들은 물론이고 나 자신도 영원히 이해하거나 받아들일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다다랐다. 자기 결정으로 살아가는 시대라 하지만 나의 결정이라 여긴 것에는 얼마나 많은 마음들이 들어있을수 밖에 없는지..
<달나라의꿈>에서는 정박아인 아들을 감추고 타인과 선을 긋고 살아가는 이웃이 등장한다. 대부분은, 아니 나부터도 그렇게 자신의 결점이나 슬픔을 감추려 선을 긋고 선 너머 타인의 삶에도 굳이 관심을 두려 하지 않는다. ‘이해받을 수 없어, 혹은 이해할 수 없을 거야’로부터 그어지는 명확한 선. 하지만 그 선을 넘어 공을 넘겨주는 이웃, 그런 박완서 작가의 시선에 나는 끝을 알 수 없는 아득한 아름다움을 느꼈다. 숨겨뒀던 병신 자식을 밀며 ‘들어가 있지 못해 이 웬수야.’ 라고 천박하게 째지는 소리를 내는 여자를 나는 과연 어떤 눈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인가. 나는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선을 긋고 얼마나 많은 사람을, 몇 번이고 밀어냈던가.. ‘선’에 서 있다고 믿으면서 상대방을 ‘악’으로 쉽게 밀어내는 나는 과연 선한 존재인지를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 놀라운 건 그 여자의 눈은 분노로 충혈돼 타는 듯하면서도 맑은 눈물이 가득 고여 있는 것이었다.’
이 책의 짧은 소설들에 등장하는 살아있는 인물들은 그렇게 조금씩 세속적이고 조금씩 정겨우며 어느 쪽으로든 재단할 수 없다. 그런 진짜 우리들을 향해 박완서 작가는 손을 내밀어준다. 그렇게 그의 짧은 소설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오랜만에 소설의 매력에 푹 빠졌다. 온전한 허구일 때 그 안에 담긴 감정은 오히려 진짜에 가까워지지 않을까 생각하며.. 펜을 내려놓고 마지막 문장을 다시 한번 곱씹어보셨을 그 언저리를, 나도 같은 대목에서 한참을 서성이다 페이지를 넘긴다.
그리고 나도, 나의 주변을 둘러본다. 나와 타인의 경계를 살펴본다. 해외에서의 삶은 경계를 갖기 좋은 구실을 만들어준다.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으니까, 그리고 이 곳 사람들과는 어차피 다르니까, 모른 척해도 되고 관심 두지 않아도 된다고 둘러댔었다. 생각해보면 삶에서 한 번도 공동체에 속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가족부터 시작해서 초중고 대학교, 동아리, 친구들도 그룹으로, 회사 등.. 나는 어딘가에 소속되기를 원하면서도 항상 그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했다. 온전한 자유의지가 비집을 틈 없는 너무도 끈끈한 관계를 버거워했다. 혼자 떠나는 여행을 동경했고 이 곳이 아닌 세계 그 어디든지 갈망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에서 벗어나 나의 온전한 자유의지를 확인받고 싶어 했다. 책임을 벗어버리고 의지만 남겨놓고 싶었다.
자유만을 갈망했던 나는
얼마나 이기적이었을까.
얼마나 무관심했을까.
‘나의 아름다운 이웃’을 읽으며 타인에 대한 관심이 곧 나에 대한 관심임을, 그리고 타인의 눈이 아닌 나의 눈으로 온전한 나를 바라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깨닫는다. 그렇게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나를 보는 시선과 가까워질 수 있다면, 내가 보는 나와 타인이 보는 내가 일치할 수 있다면, 그제야 비로소 진정한 마음의 자유를 찾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