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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원 May 17. 2021

어느 날의 등원 길

6시 반에 눈이 떠졌다. 아니, 아이의 인기척에 잠이 깼다.

첫째 아이는 항상 잠이 깨면 내 방으로 걸어온다. 내가 눈을 뜨는 걸 보면 같이 거실에 나가자고 하고 책을 들고 와서 읽어달라고 한다.

어쩔 수 없이 물 한 모금 넘기고는 잠긴 목소리로 ‘장발장’을 읽어준다. 요즘 아이가 제일 좋아하는 책이다.


둘째는 계속 꿈나라다. 7시 40분에 유치원 가는 버스를 타야 해서 남편이 둘째를 깨워 거실로 들고 나와 내 옆에 앉혀준다.

올망졸망 동그란 머리통 둘이 내 어깨에 기대어져 있다.


이사 온 뒤로, 등원 시간이 앞당겨졌다. 원래는 집에서 아침을 먹고 8시 20분까지만 가면 됐는데, 이사 온 후에는 7시 반에 버스를 타야 한다. 중국에서는 대부분 맞벌이라 회사 출근 시간에 맞춰 유치원 등원 시간도 이르다. 유치원에서는 아침도 제공해 주는데, 입이 까다로운 첫째 아이는 유치원 밥을 먹기 싫어해서 집에서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간다. 7시 반까지 아침 먹고, 세수하고, 옷 입으려면 벅찬데 눈 뜨면 책도 읽어야 하고, 장난감도 조금 갖고 놀아야 하는 아이들이다.


첫째가 혼자서 능숙하게 양말을 신고 옷을 입는 동안 나는 둘째에게 옷을 입혀준다.

“십 분 남았다. 얘들아. 지금 나가야 돼.”


집을 나서자, 교복을 입고 학교 가는 아이들이 보인다. 커다란 개를 끌고 산책하는 사람도 있다. 별다를 것 없는 아침 풍경이다. 햇살은 쏟아지고, 비로소 오월의 따뜻함이 물씬 전해온다. 아이들의 발걸음이 점점 가벼워진다. 들썩들썩하다 뜀박질이 된다. 양 손에 아이들 손을 하나씩 잡고 있던 나도 함께 오르락내리락한다. 뛰고 싶지 않은데 발걸음은 제자리인데 손과 몸뚱이만 들썩한다. 그래도 아이들은 좋단다. 나비가 되어 날아간다며 반대쪽 팔을 펄럭이기도 하고, 노래도 부른다. 그러다가 한창 심취해있는 방귀 소리를 낸다. "아이~ 방귀 뀌는 나비가 어디 있어~" 하자 아이들이 큭큭댄다. 유치원 버스를 놓칠까 다급한 나는 안중에도 없이, 내 마음 한 켠의 걱정은 안중에도 없이.

"안 되겠다, 우리 이러다 차 놓치겠어. 노란 버스, 노란 꽃 왔나 빨리 가보자, 이제 진짜 날아가야 해~!"

다른 아이들이 차에 올라타고 있다. 다행이다. 출발! 빠이 빠이~ (손가락 하트)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고 나서, 다른 엄마 한 명과 눈인사를 하고 돌아선다. 오랜만에 마스크를 쓰고 있다.

여느 날과 다름없는 평일 아침의 시작이었지만, 우리는 마스크를 쓰고 대화하지 않은 채 눈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우리는  유치원의 유일한 한국인이다. 다른 외국 국적의 아이도 한 명 있지만, 부모 중 한 명은 중국인이다. 코로나가 시작되면서, 유치원 내 유일한 진짜 ‘외국인’이라는 사실에 조심 또 조심하게 된다. 더군다나 지난해 겨울 이 도시를 한 차례 더 휩쓸고 지나갔던 코로나는 한국에 다녀왔던 조선족 할머니로부터였다.


그 사건 이후 이 도시에는 몇 개월째 코로나 확진자 0명이라는 평화가 다시 찾아왔다. 하지만 지난 주말 동안 인근 도시 두 군데에서 또다시 코로나 환자가 발생하고 말았다. 도시 내 단 한 명의 환자만 발생해도 주변 도시들까지 통제가 엄격해진다. 토요일 아침부터 유치원에서 공지가 뜨기 시작하더니, 아이들 반 선생님들로부터 따로 연락이 왔다. 발생 전 후 14일 동안 해당 도시를 방문했는지에 대한 여부를 물었고, 필요시 핵산 검사 결과를 제출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아찔하게도 남편은 지난 노동절 때 해당 도시를 방문했다. (지난번 글에도 썼던 그 망할 골프 체육대회다.) 오늘로써 2주가 지났지만, 남편은 핵산 검사를 했고 음성인 결과를 제출했다. 선생님은 나에게도 다른 도시를 방문하지 않았는지 재차 확인했고 나와 남편에게 따로 핸드폰의 녹색 큐알코드를 요청했다. (14일간 방문했던 도시가 뜸)


사실 주말 동안 근처의 대련이라는 도시에 2박 3일간 놀러 갔다 오려고 했었다. 그래서 유치원에 얘기하고 금요일에 결석 신청을 했었다. 남편 출장 겸 같이 가기로 했던 터라, 회사 관련 행사도 예정되어 있었는데, 다행히 그 때문에 공식 보도가 있기 전에 그 도시의 공항에 확진자가 다녀갔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다. 행사는 취소되었고 우리도 곧바로 짧은 여행을 취소했다. 또다시 아찔했다.


선생님들께는 모든 서류를 전달하고 확인 절차를 끝냈지만, 같은 반 엄마들의 시선이 걱정됐다. 그중 한 엄마는 남편이 노동절 때 해당 도시를 다녀온 것을 알고 있었고, 주말 동안 놀러 간다고 했던 것도 알고 있었다. 고민하다가 아침에 아이들을 버스에 태우고 나서, 아무 말 없이 먼저 들어갔던 그 엄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미리 알게 되어서 주말 동안 대련에 가지 않았다고, 남편도 해당 도시에 다녀온 지 2주가 지났지만, 핵산 검사 완료했다고. 코로나가 다시 찾아왔으니 우리 몸 잘 돌봐요, 대충 그런 내용.. 그리고는 답이 왔다.


“아 주말에 놀러 가지 않았었구나~  다행이네요. 당분간 선양 안에서만 돌아다니자고요.” 백신을 맞았는데 맞을 땐 아팠지만 마음만은 편하다는 말을 덧붙이며.


사실, 중국 백신을 맞아야 할까, 조금 더 지켜보고 맞아야 할까 고민 중이었다. 하지만 또다시 찾아온 작은 소동, 그리고 유치원 엄마와의 대화 후, 아무래도 빠른 시일 내에 우리도 백신을 맞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은 이 도시에선 '필수'가 아니라 '권고'이지만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코로나는 당연히 모두가 함께 조심해야 하는 사안이지만, 외국인의 입국을 엄격한 기준으로 차단하고 있는 중국 안에서의 외국인으로서, 이 곳 공동체에 피해를 주지 말아야 한다는 인식에 신경이 쓰이고 더욱더 조심하게 된다.


이 외에도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우리를, 어쩔 수 없는 다름을, 그들이 수용하고 받아들여준다는 느낌보다는, 우리가 그들의 공동체에 들어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느낌이 더 강하게 들 때가 많다. 낯선 곳에서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 땅에서 살아가며 많은 부분은 그들 문화를 존중하고, 말을 배우고, 다름을 받아들인다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 그렇기에 유치원 엄마들에게도 어렵지만 내가 먼저 다가가고, 말을 잘 못해서 입을 떼기가 부끄럽더라도 한 마디라도 더 건넨다. 사실, 공동체 의식이 강한 중국 사람들이고, 특히 동북 지역 사람들은 남방 쪽 보다 무뚝뚝한 편이어서, 어떨 땐 섞일 수 없는 벽 같은 게 느껴지기도 한다. 외국인이라고 도움 주는 손길도 없고, 우리에겐 익숙한 친절도 없다. 관심보다는 궁금증이 느껴질 뿐이다. 그럼에도 내가 먼저 다가가면, 굳어져있는 얼굴을 환하게 풀고 큰 목소리로 받아들여주는 사람들을 알기에, 나와 다른 낯선 것들에 그렇게 조금씩 먼저 마음을 열고 있다.


하지만 아이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조금 달라진다. 아이들이 나처럼 ‘나는 너희와 다르니까, 내가 더 노력해야지’라는 마음을 갖게 된다면,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조금 저릿해온다.  아이들만큼은 이 곳에서 이방인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흡수하며 자라는 너희들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엄마 아빠가 가진 정체성,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길 바라는 마음도 그에 못지않게 크다. 아니, 그게 먼저다. 우리가 가진 정체성, 그 위에 다양한 것들을 유연하게 얹을 수 있는 그런 모습이면 좋겠다고 바라고 있다. 해가 지날수록, 아이들이 조금씩 자랄수록, 참으로 어렵고도 중요한 일임을 조금씩 깨달아간다.


나는 오늘도 마음 한편에 있는 작은 근심과 걱정들을 접고 또 접은 다음, 나비처럼 팔랑거리는 너희의 손을 잡고 웃으며 걷는다. 렇게 이 세상 어느 것으로도 정의 내릴 수 없는 너희들의 존재 그 자체를 바라보며.




이미지 출처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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