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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원 Jul 06. 2021

시든 꽃을 바라보다가

살아있는 것의 아름다움, 사그라져가는 처절함을 가장 짧은 시간 동안 느낄 수 있는 존재, 바로 꽃이 아닐까?


지난 주말에 사서 꽃병에 꽂아놓았던 꽃들이 바짝 말라 있다. 차라리 공기 중에 말렸으면 모양 그대로 예쁘게 말랐을지도 모르는데, 물에 담갔다 시든 꽃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오그라들어있다. 가만가만 꽃잎들을 보고 있자니 내 마음도 말라서 오그라 붙는 듯하다. 연보랏빛 꽃잎은 칼날 같은 짙은 자줏빛으로 뾰족해져 있고, 분홍 꽃잎은 거무튀튀하게 쭈글거린다. 코를 가까이 대고 향기를 맡아본다. 폐 깊숙한 곳까지 닿아 몸속의 공기를 정화해주는 것만 같았던 진한 향기는, 잔향만을 남긴 채 퀴퀴하게 마른 향을 겹겹이 입었다.


기어코 아, 하는 탄식이 흘러나오고야 만다.


조금씩 나이가 들면서 작은 것들의 아름다움이 크게 다가오는 만큼, 작은 사그라짐 또한 마음에 크게 남는다. 나이 마흔에 나이가 들었다고 하긴 그렇지만, 피어남과 사그라짐을 양 손에 반반씩 들고 그 무게를 가늠해보는 기분이랄까. 꽃도 그중 하나다. 바쁜 일상 속에서 꽃 앞에 잠시 머물러 맡는 향기와 그 색감이 나를 살아있게도 하지만, 금세 시들어가는 꽃이 나를 우울하게도 한다. 얼마 전부터 남편에게 반 강제로 꽃 배달을 시킨 이후 거실 한 편에 예쁘게 피어있는 꽃은 나에게 활력소가 되어주었다. 하루 중 잠깐씩 꽃병 앞에 서서 향기를 맡으며 머물러 있는 일, 좋아하는 음악 한 번씩 틀어놓고 따라 부르는 일은 언제든 내 시간이 필요할 때 오롯이 나로 존재하게 해주는 작은 일과 중 하나다. (아이들과 분리된 시간이 필요할 때, 노래 한 곡이 재생되는 5분의 시간은 그야말로 힐링)

글을 쓰는 시간도 마찬가지이지만 더 많은 시간과 집중력이 요구되므로, 꽃과 노래, 작은 군것질 정도가 나의 ‘힐링 잽’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중에서, 꽃만큼은 나에게 ‘우울의 잽’도 날린다. 마음에 쏙 들도록 아름다운 색감이 일주일 만에 보기 싫게 축 쳐지며 빛을 잃는 것을 보면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조금씩 흔들리고 동요해온다. 그렇다고 꽃병에서 쑤욱 뽑아 쓰레기통에 버리자니 알 수 없는 죄책감이 들고, 다 시들어 말라 썩은 빛이 돌도록 놔두자니 시선을 두기가 곤혹스럽다.


결국은 시든 꽃을 며칠째 외면해 버리고 만다.

힘든 마음을 외면해버리는 내 마음과 어찌나 꼭 닮았는지..



혼자 있는 시간이 좋으면서도 외롭기도 한 건 당연한 거야.

너의 다친 마음이 보여 어찌할 줄을 몰라 내 마음도 같이 새까맣게 타기만 하는 것도 당연한 거지.

엄마와 통화 후 서운한 말 한마디가 남아 남편에게 말했더니, ‘별 것 아닌데 신경 쓰지 마’. 그 말이 또 더없이 서운한 것도 당연한 걸 거야.

그리고 너에게 책을 읽어주다가 슬픈 이야기에 네가 울음을 터트리는 게 한없이 예뻐 보이는 건.. 가슴 벅차도록 자연스러운 일이지.


그렇게 피고 지는 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일부라는 것을 생각해 본다. 꽃이 피고 지는 것처럼 내가 느끼는 모든 감정도 그 자체로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억지로 긍정적일 필요 없어. 가끔 우울한 것도 지극히 당연한 거야. 억지로 호호 흐흐 웃으면서 괜찮을 거야 별일 아니야 라고 말하는 걸 들으면 숨이 막히는 내가 이상한 게 아니야. 매사에 항상 밝게 피어있어야만 한다고, 한 없이 예쁜 색깔로 긍정적이어야만 한다고 말하는 건, 아름다운 꽃을 플라스틱 조화로 만드는 것이나 다름없어.


 스스로부터 아름다움이라는 틀에 꽃을 가두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행복이라는 틀에 인생을 가두며 살고 있지는 않았었는지..

시든 꽃을 바라보며 외면하는 마음을 들여다 본다.



<지난주>

원래는 부부싸움 후 남편이 이 주에 한 번 꽃배달을 하기로 했었는데 (중국에 현재 꽃만 간단히 배달해주는 시스템이 아주 잘 되어 있다.) 처음엔 화려한 포장에 싸인 꽃이 배달 왔다. 포장이 너무 아까웠다. 그래서 그다음엔 포장을 뺀 꽃만 간단히 배달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가족이 다 같이 마트에 갔는데 마트 한 구석에서 꽃을 팔고 있었다. “우리 배달시킬 필요 없이 여기서 같이 꽃 골라서 가자.”

아이들이 앞다투어 각각 마음에 드는 꽃을 고르기 시작했다. “난 보라색 꽃! 나는 장미!.” “그럼 아빤 노란 카네이션.”

“우와 우리가 엄마한테 꽃 사주는 거야? 이건 사랑한다는 표시야.” (언젠가 내가 아이들에게 해주었던 말을 기억한 모양이다.)

같이 모아본 꽃다발은 각각의 색으로 뭉쳐 하나로 빛났다.

지는 꽃을 보고 우울했다가도 꽃을 골랐던 그 시간들이 생생히 비집고 떠오르기도 하니, 오늘도 발걸음은 또다시 마트 한 구석 꽃집을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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