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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원 Jul 13. 2021

공감, 그 어려운 일에 대하여

당신이 옳다, 정혜신

당신이 옳다 

 체중을 실은  짧은 문장만큼 누군가를 강력하게 변화시키는 말은 세상에  없다.


열정적이고 따뜻하면서도 날카롭게 공감에 대한 통찰을 풀어놓은 글을 읽으며 소위 '무한 공감'을 했다. ‘그래 그렇지’ ‘맞아’의 공감이 아니라 마음이 스르르 풀어져 엉엉 울고 싶어지는 그런 공감이었다. 머리로 하는 공감이 아니라 마음이 하는 공감이 그런 것일까. 그렇다면 지금껏 내가 해왔던 공감은 어떤 것이었을까.


작가가 말하는 ‘당신이 옳다’라는 공감은 내가 지금껏 알아왔던 ‘공감’과는 달라도 많이 달랐다. 말하자면, 내가 아는 공감이 당신이 옳다는 말인 줄은 미처 몰랐다.


공감이 흔한 세상이다. 댓글에는 '공감해요'가 쉽게 달리고, 아이에게는 공감이 훈육의 전부인 듯 보인다. 꽤 오랫동안 우리를 둘러싼 모든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은 ‘공감’으로 귀결되어 왔다. 따뜻한 공감의 말, 듣기 좋은 말들이 오갔으며, 누구나 상대방에게 그러한 공감의 말을 건네줄 수 있어야 했다. 정해진 룰과 바른말을 따르는 게 당연했던 이전 세대와는 다르게 공감이란 걸 할 줄 안다고 믿었다. 떼를 쓰고 우는 어린아이에게도, 사춘기 아이에게도, 부부 사이, 친구 사이에서도. 그런데도 우리는 왜 여전히 아플까?


 1장. 왜 우리는 아픈가.
누구든 내 삶이 나와 멀어질수록 위험해진다. p.42
젊든 늙든 우리가 왜 이렇게 아픈지 이젠 알 것 같다. 자기 존재에 주목을 받은 이후부터가 제대로 된 내 삶의 시작이다. 거기서부터 건강한 일상이 시작된다. 노인도 그렇고 청년이나 아이들도 그렇다.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다. p.48
감정을 억제하고 투명 인간 취급을 당하며 존재가 거의 희미해진 삶의 종착역은 어디일까. 소리 안 나는 총에 맞은 사람처럼 조용히 허물어지는 일이다 p.58


이 책의 첫 장에서부터 그에 대한 답을 조금씩 찾을 수 있었다. 나 자신이 먼저 공감받기를 원하면서도 우리는 먼저 타인을 공감해 주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시대적 동질감, 소속되어 있는 집단, 가장 가까운 가족이라는 공동체에서까지 나를 지우고 타인에게 맞추는 일이 익숙하다. 관계를 위한 관계를 위해 너무도 쉽게 너와 나의 경계를 허문다. 공감이라는 것에 목이 말랐던 나 역시도 그랬다.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라 여겨 마지않았던, 너를 향한 공감에의 노력이 실은 나를 갉아먹는 자기 소멸 행위였던 것이다.


공감하는 일의 전제는 공감받는 일이다.  p.194


스스로를 정신과 전문의가 아닌 ‘치유자’라 부르는 작가는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공감’이라 말한다. 그 흔한 공감이 사람을 살리는 일이라 말한다. 그리고 치유자로서의 절절한 경험과 철학을 담은 한 마디 ‘당신이 옳다’로 지금껏 알아왔던 공감과는 다른 깊이의 공감을 전달한다.


‘당신이 옳다’라는 말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그럴 수도 있지’, ‘그랬구나’ 혹은 그 뒤에 세트로 흔히 따라붙는 ‘충조평판’ (충고, 조언, 평가, 판단)과는 차원이 다른 묵직한 흔들림이다. 그만큼 우리에게서 찾기 힘든 인색한 말이다. 떠올려보면 지금까지 ‘네가 맞아’ ‘네가 옳아’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드물다. 반면 ‘~야지’ ‘~해봐’라는 말은 수두룩하게 들었다. 누군가 나에게만 유독 그렇게 말했던 것은 아닌 듯하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우리는 그렇게 듣고 말하는 데 익숙하다.


해외에 있어서 힘든 점을 친구에게 털어놓으면, 친구는 ‘힘들겠네, 거기서 취미 생활도 하고 너만의 생활을 가져봐’라는 말을 건넨다. 힘들다고 말하는 사람은 일상에서 느끼는 여러 감정 중 힘든 감정을 얘기하는 것뿐인데, 나는 ‘힘들어하는 사람’ 이 되어버린다. 나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보아주고 잠깐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를 바라는 것뿐인데, 그렇게 되는 일은 드물다.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어떻게든 도움이 되려고 따뜻한 ‘충조’를 건네는 쪽은 그래도 양반 아니 천사다. 부모님에게 힘든 감정을 조금이라도 털어놓을라 치면 모든 전제는 생략되고 ‘평판’만이 물밀듯 쏟아져 피할 곳이 없어진다. 모두에게 물론 악의는 없다. 자식 하나 바른길로 인도하려는 부모 마음 아닌가. 단지, 진정 상대방을 위한다고 여겼던 그런 말들이 안타깝게도 악의 없는 상처를 입힐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한 번도 공감받지 못한 상처는 매우 깊을 수 있다.


그렇게 누군가의 아픔에는 적극적으로 충고나 조언을 하긴 쉽지만 스스로의 감정을 드러내는 일은 서툴다. 드러내면 부족한 사람이 되는 것 같다. 나의 부정적인 감정이 누군가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스스로 더 강해져야 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출구가 없는 곳에 갇히고 만다. 책을 읽으며, 출구 없이 갇혀서 한없이 아프기만 했던 지난날들이 떠오르기도 했고, 그토록 이해받고 싶어 했던 마음이 곧 살고자 했던 마음이었다는 것도 알았다. 그리고 지금 내가 이렇게 잘 살아 있는 건, 단 한 사람의 공감 때문이라는 생각을 했다.


내 고통에 진심으로 눈을 포개고 듣고 또 듣는 사람, 내 존재에 집중해서 묻고 또 물어주는 사람, 대답을 채근하지 않고 먹먹하게 기다려주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상관없다. 그 사람이 누구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렇게 해주는 사람이 중요한 사람이다. 그 ‘한 사람’이 있으면 사람은 산다.

한 사람의 힘이 그렇게 강력한 것은 한 사람이 한 우주라서 그럴 것이다. 근사한 수식이나 관념적인 언어가 아니라 마음에 관한 신비한 팩트다. 사람은 그 ‘한 사람’이라는 존재의 개별성 끝에서 보편성을 획득한다. 그러므로 한 사람은 세상의 전부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한 사람이고 한 세상이다. 그래서 누구든 결정적인 치유자가 될 수 있다. p.113


남편은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 아니다. 스스로가 공감 능력이 부족한 게 이상하게 느껴진다고 털어놓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남편은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아무런 충고나 평가도 하지 않고 들어줬다. 그렇게 힘들었는데 이렇게 잘 자랐다고. 그것 만으로도 나에겐 남편이 유일한 ‘치유자’였다. 마음이 닫히지 않은 상태에서 나의 기억이나 생각들을 하나씩 꺼내고 마주할 수 있었기에, 단 한 사람이라도 내 감정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내 마음에 홀로 갇히지 않을 수 있었다.


아이들을 향한 공감이 어렵지 않았던 것도, 나의 공감이 먼저였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단 한 번이라도 공감받은 상태가 아니었다면 아이들에게도 절대 공감의 손을 내밀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도 우선은 아이들의 감정이 우선이지만 그만큼 엄마의 감정을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선에서 전달하려고 노력한다.


너를 공감하다 보면 내 상처가 드러나서 아프기도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나도 공감받고 나도 치유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된다. 공감하는 사람이 받게 되는 특별한 선물이다. p.126


감정의 자유가 곧 마음의 자유 아닐까 싶다. 내 감정을 있는 그대로 말로 표현할 수 있고, 그 감정을 누군가 들어줄 수 있다면 그것 만으로도 살 수 있다. 누구에게나, 어떤 상황에서든, 이유 막론하고 단 한 번이라도 누군가 나에게 네가 전적으로 옳다고 말해주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럴 때 진정한 공감을 해주는 이가 단 한 명이라도 곁에 있다면 그건 진정한 축복일 것이다. 책을 읽으며 지금까지 공감 하나로 변화할 수 있었던 날들이 떠오르는 한 편, 나는 그만큼 누군가에게 공감의 손을 내밀었던가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공감이란 단어는 항상 나만을 향하고 있진 않았을까. 아무리 봐도 네가 틀렸고 내가 맞는데 아무도 몰라주는 것만 같아서 그저 상대방을 이해할 수 없는 영역에 몰아넣기만 했던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한동안 나에게 공감이란 부끄럽게도  ‘내가 옳다’에 그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다다랐다.  


그러면서충조평판에 예민하게 구는 나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기도 했다. 그냥 좀 무디게 지나가면 어때서? 다른 사람한텐 아무렇지도 않은 말을 왜 이렇게 예민하게 받아들여? 하지만 내 감정에 민감했던 시간들이 타인을 향한 공감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알 것 같다. 내 마음처럼 타인의 마음을 바라볼 때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는 것을 느낀다. 여전히, 내 감정에 민감해지기는 쉽고, 남의 감정에 민감해지는 일은 어렵다. 특히 가까운 가족 사이에서나 1 대 1의 갈등에서는 더 어렵다. 누구에게나 내가 먼저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나를 들여다보는 만큼 너를 들여다보려 한다.  누군가에게 그 한 사람이 되어보려 한다. ‘당신이 옳다’는 공감으로..


어쩌면 공감이란 그다지 어려운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감정이 풍부한 사람의 전유물도 아니다. 신이 아닌 우리들은 누군가에게 공감을 받고, 또 그로 인해 누군가를 공감해줄 수 있게 되며, 너를 공감하다 나에 대한 공감을 경험한다. 제대로 된 공감만이 너와 나 사이의 유일한 열쇠라는 것을 알게 된다.  누구보다 내가 먼저인 이기적인 한 인간으로서, 누군가에게 ‘당신이 옳다’라는 말을 할 수 있다는 건, 그렇게 보이지 않는 사랑이 필요한 일이다. ‘당신이 옳다 그래서 참으로 아름답다.


사람은 자기가 안전하다고 느껴야 자신이 놓인 상황을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볼 수 있다. 그러니 공감에 제한을 둘 필요는 없다. 사람은 믿어도 되는 존재다. 사랑하는 사람의 유일한 역할이 그것이다. p.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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