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된 선생님이 되자
오래도록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했던 나에겐 가르친다는 것이 가장 쉬운 일이었던 순간이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누군가에게 알려주고 그 사람도 잘하게 만드는 일, 난 그런 일이 좋았다. 하지만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것은 쉽게 오해를 살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나도 모르게 내뱉은 말들이 누군가에겐 가르치려고 드는 귀찮고 언짢은 말이 되어버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오래도록 익숙했던 영어 선생님이라는 역할을 그만두고 아이들과 고전 책을 읽고 토론하는 일을 하기로 선택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물었다.
왜 그 좋은 직업을 그만두고 바꿨어요?
우리나라에서 영어 선생님이 된다는 것은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즐거움을 숨기고 영어를 점수 내는 과목으로 전환시켜주어야 하는 일이었다. 그게 정말 싫었다. 더 이상 아이들은 새로운 언어를 배워서 그 언어를 이해하고 귀에 들리는 경험에서 그칠 수 없었다. 말할 줄 알게 되면 찾아오는 그 짜릿한 신세계를 즐겁게 맞이할 수 없는 현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오래도록 일해서 ’이 정도 배웠으면 이 정도는 해야 하는데 ‘ 싶은 나만의 오래되고 낡아버린 잣대가 내 안에 단단하게 자리 잡고 있어서 그걸 깨뜨리는 게 쉽지 않아서였다.
과감하게 모두 내려놓고, 자신도 없고 잘하지도 못하는 고전 선생님이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에도 괜찮았다. 나는 무엇보다 확신이 있었다. 그 이유는 배우는 내내 내가 정말 행복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좋은 수업을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다니 생각만 해도 정말 신이 났다.
하루라도 빨리 하고 싶어서 자격증 이수를 다 끝마치기도 전에 내 아이와 조리원 친구들을 모아 그룹 수업을 시작했다. 처음엔 어색해하고 두려워했던 아이들은 매주 좋은 책을 읽고 만나서 이야기하는 이 시간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내 아이와도 함께 책을 읽고 주변의 많은 아이들과 같이 성장하는 고전 선생님이 되었다.
이제 3년, 여전히 나는 초보 선생님이지만 그래서 더 좋다. 내가 잘 모르니까 아이들의 마음을 이해하기 쉬웠다. 그 과정을 모두 온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어서 말이다. 영어도 처음 가르치기 시작했을 때는 그랬는데, 그 가르친다는 것에 가려져 본질을 잃어버리고 말았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난 강사라 할지라도 아이들이 스스로 잘하도록 만들지 못하면 그 실력 발휘를 제대로 할 수가 없다. 가르친다는 것은 지식이나 기능 그리고 이치 따위를 깨닫게 하거나 익히게 하는 행위이다. 그런데 그다음의 사전적 의미에는 ‘그릇된 버릇 따위를 고치어 바로잡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코칭은 다르다. 학습자가 자기 주도성을 가지고 스스로 공부하고 행복한 삶을 능동적으로 추구할 수 있도록 가르쳐 주는 것, 시합에서 좋은 결과를 내는 것을 목표로 선수들을 발굴하거나 선발하고 선수와 팀을 훈련하여 승리를 위해 팀을 이끄는 행위가 바로 코칭이다. 고전 선생님은 가르친다는 행위보다는 코칭을 한다는 것에 더 가까웠다. 그래서 반했고, 좋아했다.
고전 선생님이 되는 길은, 아이들의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어려운 책을 어떻게 읽어왔나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선생님은 생각도 못해봤는데 정말 그럴 수도 있겠어요.
아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가 순간 아이들이 나와 같은 또래로 느껴졌던 날도 많다. 아니 솔직히 고백하자면 가끔은 나보다 주변 성인들보다 더 어른 같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이것저것 따지기 좋아하고 재는 것 좋아하는 어른들은 절대 알 수 없는 인생의 가장 단순하고 중요한 진리를 이미 깨닫고 살고 있는 느낌, 아이들은 더 이상 아이들이 아니었다.
어쩌면 가르친다는 말 뒤에는 내가 더 오래 살았으니까, 어른이니까, 더 많이 아니까 라는 시커먼 속마음을 숨겨두었는지도 모른다. 무언가를 배우고 익혀서 잘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핵심을 놓치고 사회가 기대하는 결과와 타협하며 더 빠른 실력과 성과를 드러내길 바라며 살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명심
마음을 고요히 가지고 사색함
보고 듣는 것에 따라 휘둘리지 않는 마음
선생님, 이제 우리 아이 학년이 있는데 논술해야 하지 않을까요? 책을 읽고 글을 쓰는데 느는 것 같지 않아요.
뭐 더 시켜야 할까요? 글은 괜찮나요?
가끔 어머님들이 걱정하시는 말을 들으면 한편으로 다 이해하는 마음이 들지만 안타까운 마음이 더 크게 느껴진다. 오래전에 아이들을 만나고 가르치려고 했던 마음의 나처럼 더 잘해주고 잘하게 해 주기 위해 애쓰는 마음이 어떤 것인 줄 알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나는 늘 명심한다. 보고 듣는 것에 따라 휘둘리지 않으려고 말이다.
아이들의 잠재력은 무한하고,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아니 특히 엄마가 생각하는 것보다 참 영글고 단단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바쁜 일정 속에서도 매주 책을 읽고 정해진 시간에 책상 앞에 앉는 것만으로도 너무 기특하다고 생각하니까.
어른인 우리들은 책을 읽고 생각을 이야기하는 것도 쉽지 않다는 것을 안다. 게다가 그 생각을 정해진 시간 안에 글로 쓴다는 것은 어깨에 내려앉은 무거운 짐처럼 견디기 쉽지 않은 무게라는 것을 모두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아이들에겐 강요한다. 그렇게 나도 하지 않으면서 아이들에게 독서하고 글쓰기 하도록 권유하는 진짜 목적은 무엇에 있을까?
은유 작가의 글쓰기 상담소에 보면 “글을 못 써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 다 쓴 글이 잘 쓴 글입니다. “
수업시간에 만난 아이들에게도 이 말을 꼭 해준다. 잘 쓴 글, 못 쓴 글은 따로 없다고. 써내려 간 것만으로도 엄청난 일을 해낸 거라고 말이다. 이젠 가르친다는 마음이 아니라 아이들에게 배운다는 마음으로 수업을 한다. 매주 아이들이 써 놓은 글에서 감탄하며 배우는 시간이 정말 값지다. 영어 선생님 그만두고 고전 선생님 하길 진짜 잘했다. 어디에 가서 이렇게 아이들의 보물 같은 이야기를 읽고 듣고 배울 수 있을까?
이제 가르친다는 말은 더 이상 사용하지 말고 가르치지 않으려고 애써야 한다. 알려준다 정도가 알맞을 것 같다. 옆에서 응원하는 코칭이 어쩌면 내가 진짜 바라던 방법의 교육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아이걱정, 세상 걱정 그만하고 어른인 우리부터 글을 써야 한다. 용기를 가지고 매일 쓰는 일부터 시작해서 나보다 더 어른처럼 성숙하게 잘 자라고 있는 자녀 걱정보다, 더 이상 남이 알아주길 바라지 말고 내 마음부터 내가 알아주자는 마음으로 글쓰기를 시작해 보면 좋겠다. 열심히 읽고 쓰는 가운데 지나간 일을 되돌리고 나를 둘러싼 사람을 오래 들여다보도록 북돋아주며 사람을 생각하는 사람을 만든다는 말처럼 <은유의 글쓰기 상담소> 오늘도 다 쓴 글이라고 우기며 글을 완성해 본다.
그럼, 아이들이 시간 안에 써 내려간 그 짧은 글 속에서 자동으로 감탄사를 선물 받게 될 테니까. 나부터 잘하자.